당신께 요즘 '집'은 어떤 공간인가요. 언제 떠나고 싶고, 언제 돌아오고 싶은가요. 누구와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물리적 위치, 환경은 똑같아도 거기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에 따라 공간이 참 다르게 다가오지요. 애증의 삶의 터전인 '집'은 더욱 그렇고,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은 더더욱 관계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그래서 집이, 살림을 산다는 게 참 쉬운 날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가장 큰 고비는 롤러코스터가 멈추고, 공간이 침체되기 시작할 때 오더군요. 고립감과 우울이 엄습하여 온 몸과 집 전체를 뒤덮을 때요.
2022년 '1인가구의 몸 돌봄'을 주제로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작업이 진행될수록 점점 깊은 동굴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1인가구'가 정확히 무엇인지, 한 공간에 홀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지, 옛날식 '가족' 개념에서 벗어나 사는 사람을 말하는지. 혼자 사는 건 어떤 건지, 어느 정도의 분리와 고독, 혹은 고립을 수반하는 삶의 양식을 칭하는 건지, 잠만 같은 지붕 아래 자면 혼자 사는 게 아닌지. 수없는 질문들에 우두커니 멈춰서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바쁜 세상에 혼자서 부유하고 고립된 듯한 날들을 느끼던 시절에는 '1인가구'의 삶이 원래 이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집 비밀번호를 내어준 동반자들이 생기고, 잘 때마다 옆구리를 내어주게 되는 반려견이 생기니, 주민등록 상에는 변한 게 없는데 뉴스나 정부가 이야기하는 '1인가구' 맞나 싶었습니다. 어쨌든 '1인가구 지원'의 정체성을 띈 사업에 참여하면서, 시작 전에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던 프로젝트 목표들이 점점 희미해지고, 이제는 어떤 '사업 성과'와 '효과'를 이야기해야 하나 깊이 고민 중입니다. 계획했던 목표 중 이룬 건 없고, 계획했을 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흩어지고, 머리는 어느 때보다 비어있습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과 작별하는 시점, 상상치 못한 대화를 환영할 공간, 새로운 시각과 서사로 문제를 재조명할 힘이 이제서야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몇 개월동안 '1인가구 돌봄'을 생각하며 만든 영상 <몸으로 쓰는 에세이>는 1인가구 이슈를 둘러싼 새로운 대화, 생각의 물꼬를 틀 하나의 재료입니다. <몸으로 쓰는 에세이>는 저희가 1인가구의 돌봄을 고민하다 몸이 바닥을 쳤을 때 만들어진 영상입니다. 바닥을 치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며 비로소 피어나온 움직임과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혹 19분의 고요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저희의 이야기가 어떤 걸 촉발시켰는지요.

멈추지 않는 생각의 소용돌이, 삶을 짓누르는 아픈 과거, 불투명한 미래의 초조함,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를 망가뜨리는 경쟁과 착취, 다름과 취약함에 대한 비난, 혐오,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적응과 순응, 자괴감과 무력함으로 힘겹게 배회하는 모든 이들에게.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

긴장의 세월이 쌓여 갑옷처럼 굳은 어깨와 가슴, 골반을 반죽한다. 반죽을 굴리고 치댈 수록 따뜻하고 쫄깃해진다. 답답함, 불편함, 아픔이 이끄는 곳으로 몸이 가도록 허락한다. 침묵을 깨고 이런 저런 느낌과 움직임들로 몸이 말하기 시작한다. 그래 말해봐. 그래 움직여도 돼. 허용하고 격려할 수록 몸은 더 많은 관절과 근육, 장기들을 깨우며 꿈틀거린다. 그간 몸이 보냈던 신호들.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를 만나고 싶어서, 지키고 싶어서였구나. 열심히 소리치는 몸을 질책하며 약과 갖가지 자극들로 잠재우려 했던 내가 짠하고도 미안해졌다.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

한 발로 서서 움직여본다.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뿌리 뽑히지 않는 발의 지지를 받아, 다른 발로 주변 공간을 탐색한다. 몸 바깥쪽으로, 안쪽으로 돌려보기도 하고, 높낮이를 바꿔보기도 한다. 내면의 중심과 바깥 세상을 살피는 것 간의 균형. 균형은 정적이지 않다. 박제된 균형을 고수하려는 허상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떨리고 흔들려야 나의 뿌리를 지킬 수 있다.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

다시 고요히 멈춰 서 보니, 이전과는 다른 감각으로 존재하는 나를 발견한다. 깨어있으면서도 평온하다. 세상을 향해 나 자신을 열 수 있을 듯도 하다. 무언가를 품을 공간이 생겼다.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

길고 가벼워진 팔을 느끼며 나의 몸 구석구석 ‘참 장하다’ 쓸어준다. 이제 나도 나를 위로할 수 있음을 안다. 몸은 나에게 쉼을 허락할 수 있는 곳임을 안다. 이제 몸과 함께 다시 나아간다.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
당신께 요즘 '집'은 어떤 공간인가요. 언제 떠나고 싶고, 언제 돌아오고 싶은가요. 누구와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물리적 위치, 환경은 똑같아도 거기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에 따라 공간이 참 다르게 다가오지요. 애증의 삶의 터전인 '집'은 더욱 그렇고,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은 더더욱 관계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그래서 집이, 살림을 산다는 게 참 쉬운 날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가장 큰 고비는 롤러코스터가 멈추고, 공간이 침체되기 시작할 때 오더군요. 고립감과 우울이 엄습하여 온 몸과 집 전체를 뒤덮을 때요.
2022년 '1인가구의 몸 돌봄'을 주제로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작업이 진행될수록 점점 깊은 동굴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1인가구'가 정확히 무엇인지, 한 공간에 홀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지, 옛날식 '가족' 개념에서 벗어나 사는 사람을 말하는지. 혼자 사는 건 어떤 건지, 어느 정도의 분리와 고독, 혹은 고립을 수반하는 삶의 양식을 칭하는 건지, 잠만 같은 지붕 아래 자면 혼자 사는 게 아닌지. 수없는 질문들에 우두커니 멈춰서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바쁜 세상에 혼자서 부유하고 고립된 듯한 날들을 느끼던 시절에는 '1인가구'의 삶이 원래 이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집 비밀번호를 내어준 동반자들이 생기고, 잘 때마다 옆구리를 내어주게 되는 반려견이 생기니, 주민등록 상에는 변한 게 없는데 뉴스나 정부가 이야기하는 '1인가구' 맞나 싶었습니다. 어쨌든 '1인가구 지원'의 정체성을 띈 사업에 참여하면서, 시작 전에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던 프로젝트 목표들이 점점 희미해지고, 이제는 어떤 '사업 성과'와 '효과'를 이야기해야 하나 깊이 고민 중입니다. 계획했던 목표 중 이룬 건 없고, 계획했을 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흩어지고, 머리는 어느 때보다 비어있습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과 작별하는 시점, 상상치 못한 대화를 환영할 공간, 새로운 시각과 서사로 문제를 재조명할 힘이 이제서야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몇 개월동안 '1인가구 돌봄'을 생각하며 만든 영상 <몸으로 쓰는 에세이>는 1인가구 이슈를 둘러싼 새로운 대화, 생각의 물꼬를 틀 하나의 재료입니다. <몸으로 쓰는 에세이>는 저희가 1인가구의 돌봄을 고민하다 몸이 바닥을 쳤을 때 만들어진 영상입니다. 바닥을 치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며 비로소 피어나온 움직임과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혹 19분의 고요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저희의 이야기가 어떤 걸 촉발시켰는지요.

멈추지 않는 생각의 소용돌이, 삶을 짓누르는 아픈 과거, 불투명한 미래의 초조함,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를 망가뜨리는 경쟁과 착취, 다름과 취약함에 대한 비난, 혐오,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적응과 순응, 자괴감과 무력함으로 힘겹게 배회하는 모든 이들에게.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

긴장의 세월이 쌓여 갑옷처럼 굳은 어깨와 가슴, 골반을 반죽한다. 반죽을 굴리고 치댈 수록 따뜻하고 쫄깃해진다. 답답함, 불편함, 아픔이 이끄는 곳으로 몸이 가도록 허락한다. 침묵을 깨고 이런 저런 느낌과 움직임들로 몸이 말하기 시작한다. 그래 말해봐. 그래 움직여도 돼. 허용하고 격려할 수록 몸은 더 많은 관절과 근육, 장기들을 깨우며 꿈틀거린다. 그간 몸이 보냈던 신호들.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를 만나고 싶어서, 지키고 싶어서였구나. 열심히 소리치는 몸을 질책하며 약과 갖가지 자극들로 잠재우려 했던 내가 짠하고도 미안해졌다.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

한 발로 서서 움직여본다.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뿌리 뽑히지 않는 발의 지지를 받아, 다른 발로 주변 공간을 탐색한다. 몸 바깥쪽으로, 안쪽으로 돌려보기도 하고, 높낮이를 바꿔보기도 한다. 내면의 중심과 바깥 세상을 살피는 것 간의 균형. 균형은 정적이지 않다. 박제된 균형을 고수하려는 허상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떨리고 흔들려야 나의 뿌리를 지킬 수 있다.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

다시 고요히 멈춰 서 보니, 이전과는 다른 감각으로 존재하는 나를 발견한다. 깨어있으면서도 평온하다. 세상을 향해 나 자신을 열 수 있을 듯도 하다. 무언가를 품을 공간이 생겼다.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

길고 가벼워진 팔을 느끼며 나의 몸 구석구석 ‘참 장하다’ 쓸어준다. 이제 나도 나를 위로할 수 있음을 안다. 몸은 나에게 쉼을 허락할 수 있는 곳임을 안다. 이제 몸과 함께 다시 나아간다.
- 몸으로 쓰는 에세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