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을 오로지 머리를 사용해 추상적이고 기호학적인 능력을 키우는 지적 활동으로만 여기면, 듀이가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몸을 교육의 방해꾼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조용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몸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것 자체를 지적이지 못한 활동이라고 억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몸을 억압하면 머리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판단하지 말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수동적으로 듣고 따르기만 하라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몸을 억압한 결과, 정신은 오히려 피로해지고 만다. 생각을 몸이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몸도 피곤해진다. 머리만 쓰게 함으로써 피곤이 곱절이 되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한 결과가 교실에서 흔히 보이는 ‘널브러진 몸’이다. 공부를 거부하거나 포기한 학생들만 수업 시간에 가만히 있는다. 아예 배움을 포기한 상태이다 보니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저 널브러져 잠을 자거나 무력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다.
한편, 몸이 최대한 활성화되어야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가르쳐줄 수는 없되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할 때는, 지적인 과정에서 몸이 반응하는 게 아니라 몸을 통해 배우면서 지적인 과정이 자극된다. 활동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가르쳐줄 수는 없되 배워야만 하는 것에 속한다.
교육을 오로지 머리를 사용해 추상적이고 기호학적인 능력을 키우는 지적 활동으로만 여기면, 듀이가 혹독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몸을 교육의 방해꾼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조용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몸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것 자체를 지적이지 못한 활동이라고 억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몸을 억압하면 머리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판단하지 말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수동적으로 듣고 따르기만 하라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몸을 억압한 결과, 정신은 오히려 피로해지고 만다. 생각을 몸이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몸도 피곤해진다. 머리만 쓰게 함으로써 피곤이 곱절이 되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한 결과가 교실에서 흔히 보이는 ‘널브러진 몸’이다. 공부를 거부하거나 포기한 학생들만 수업 시간에 가만히 있는다. 아예 배움을 포기한 상태이다 보니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저 널브러져 잠을 자거나 무력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다.
한편, 몸이 최대한 활성화되어야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가르쳐줄 수는 없되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할 때는, 지적인 과정에서 몸이 반응하는 게 아니라 몸을 통해 배우면서 지적인 과정이 자극된다. 활동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가르쳐줄 수는 없되 배워야만 하는 것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