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빈(木村敏)의 '아이다(あいだ, 사이)'가 알려주는 것
한국어에 '사이가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가 가깝다는 뜻입니다. '사이가 틀어졌다'고도 하고, '사이를 둔다'고도 합니다. 우리는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사이'라는 말을 씁니다.
가만히 보면 이상한 표현입니다. 좋아지는 것은 그 사람인데, 우리는 '그 사람이 좋다'고 하지 않고 '사이가 좋다'고 합니다. 마치 두 사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둘 사이의 어떤 자리가 따로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기무라 빈(木村敏)’은 바로 이 '사이'라는 말에 주목했습니다.

서양에서 배우고 동양에서 물은 사람
기무라 빈은 교토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독일 뮌헨과 하이델베르크에서 서양의 현상학을 배웠습니다. 하이데거를 읽었고, 유럽의 정신병리학자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자리는 서양 사상의 반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양 철학의 도구를 손에 쥔 채, 일본어 안에 담긴 사유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하나의 전제를 다시 물었습니다. '나'라는 것이 정말로 먼저 있는 게 맞나. 완성된 개인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관계를 맺는가. 그의 대표작 제목이 그의 답을 이미 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人と人との間)』입니다.
나는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서양 철학의 오랜 그림에서, 인간은 먼저 하나의 독립된 개인입니다. 각자 자기 안에 완결된 '나'를 지니고 있고, 그런 '나'들이 모여 사회를 이룹니다. 관계는 이미 존재하는 개인들이 나중에 맺는 것입니다.
기무라 빈은 순서를 뒤집습니다. 그가 보기에 '나'는 관계보다 먼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먼저 있고, 그 사이에서 비로소 '나'가 생겨납니다. 그는 이 사이를 ‘아이다(あいだ)’라 불렀습니다.
아이다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리는 이미 양쪽에 두 사람이 있어야 놓을 수 있습니다. 기무라의 아이다는 그보다 앞섭니다. 나와 너를 있게 하는 근원적인 바탕이 먼저 있고, 그 바탕에서 나와 너가 나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본인이 예로부터 인간을 '사이에 있는 존재'로 이해해왔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인간(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 사이'를 뜻합니다.
'마(間)'라는 오래된 감각
이 '사이'의 감각은 기무라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에는 오래전부터 '사이'를 소중히 여기는 감각이 있었습니다.
일본어에서 이 글자는 '마(間)'로도 읽힙니다. 음악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 그림에서 그려지지 않은 여백, 건축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 대화에서 말과 말 사이의 뜸. 이 비어 있는 사이가 오히려 전체를 살아 있게 만든다는 감각입니다. 서예의 여백이 글씨만큼 중요하고, 다도에서 동작과 동작 사이의 고요가 차만큼 중요합니다.
기무라는 이 문화적 감각을 인간 존재의 근본 구조로 끌어올렸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비어 있는 자리가, 실은 관계가 살아 있는 바로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채워진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그 사이에서, 만남이 일어납니다.
사이가 무너질 때
기무라 빈은 사상가이기 전에 임상 의사였습니다. 그가 아이다를 사유하게 된 것은 책상이 아니라 진료실에서였습니다.
그는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을 오래 만나면서, 그들이 겪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바로 이 '사이'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나와 타인 사이의 그 살아 있는 관계, 나와 세계 사이의 자연스러운 이어짐이 흔들릴 때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마음의 병은 한 개인의 내부에서 고장 난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존재하는 그 '사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관점은 마음을 보는 눈을 바꿉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 머릿속에, 개인의 안쪽에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기무라가 보기에 마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그 사이가 살아 있다는 뜻이고, 병든다는 것은 그 사이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서양의 '사이'와 만나는 자리
기무라 빈이 서양에서 주목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아이다는 서양 철학이 오래 씨름해온 주제와 놀랍도록 가까이 닿아 있었습니다.
마르틴 부버는 '나-너'의 만남을 이야기하며 그 만남이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몸과 몸이 얽히는 상호신체성을 말했습니다. 위니콧은 나와 너 사이의 '잠재적 공간'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언어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기무라의 아이다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서양 이론의 번역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언어와 감각에서 자라났다는 점입니다. 부버가 철학으로 애써 도달한 자리에, 동아시아인은 '사이가 좋다'는 일상의 말로 이미 서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서양이 개인에서 출발해 관계로 나아가야 했다면, 동아시아는 처음부터 사이에서 출발했습니다.
놀이가 일어나는 사이
이 관점으로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놀이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가 달리 보입니다.
함께 노는 두 아이를 떠올려 봅니다. 놀이는 어느 한 아이의 머릿속에 있지 않습니다. 상대 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놀이는 두 아이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주고받는 눈빛과 웃음과 몸짓 사이, 다가갔다 물러나는 거리 사이, 그 비어 있는 자리에서 놀이가 살아 움직입니다. 그리고 기무라의 말을 빌리면, 그렇게 함께 노는 사이에서 아이는 '나'가 되어갑니다. 혼자 완성된 아이가 나와서 노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노는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 빚어집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함께 놀 사이를 지켜준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를 만들어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가 '나'로 자라날 수 있는 자리를 지켜주는 일입니다.
사이를 잃어가는 시대
기무라 빈이 남긴 물음은 오늘 날 더 깊이 와닿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점점 얇아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화면을 통해 이어지지만 그 사이에는 눈빛도, 침묵도, 거리도, 몸의 뜸도 없습니다. 채워진 정보만 오갈 뿐, 비어 있는 그 살아 있는 사이가 사라집니다. 기무라가 마음의 위기로 보았던 바로 그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끊어짐이 조용히 일상이 되어갑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관계의 양이 아니라, 사이의 질일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사이에 눈빛과 침묵과 거리가, 그 살아 있는 여백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어를 쓰는 우리는, 그 '사이'라는 말을 이미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 글은 기무라 빈(木村敏, 1931–2021)의 '아이다(あいだ)' 개념을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人と人との間)』(1972)가 있으며, 그의 사유는 서양 현상학과 니시다 기타로를 비롯한 일본 철학의 만남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의 저작 중 일부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기무라 빈(木村敏)의 '아이다(あいだ, 사이)'가 알려주는 것
한국어에 '사이가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가 가깝다는 뜻입니다. '사이가 틀어졌다'고도 하고, '사이를 둔다'고도 합니다. 우리는 관계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사이'라는 말을 씁니다.
가만히 보면 이상한 표현입니다. 좋아지는 것은 그 사람인데, 우리는 '그 사람이 좋다'고 하지 않고 '사이가 좋다'고 합니다. 마치 두 사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둘 사이의 어떤 자리가 따로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기무라 빈(木村敏)’은 바로 이 '사이'라는 말에 주목했습니다.
서양에서 배우고 동양에서 물은 사람
기무라 빈은 교토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독일 뮌헨과 하이델베르크에서 서양의 현상학을 배웠습니다. 하이데거를 읽었고, 유럽의 정신병리학자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자리는 서양 사상의 반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양 철학의 도구를 손에 쥔 채, 일본어 안에 담긴 사유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하나의 전제를 다시 물었습니다. '나'라는 것이 정말로 먼저 있는 게 맞나. 완성된 개인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관계를 맺는가. 그의 대표작 제목이 그의 답을 이미 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人と人との間)』입니다.
나는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서양 철학의 오랜 그림에서, 인간은 먼저 하나의 독립된 개인입니다. 각자 자기 안에 완결된 '나'를 지니고 있고, 그런 '나'들이 모여 사회를 이룹니다. 관계는 이미 존재하는 개인들이 나중에 맺는 것입니다.
기무라 빈은 순서를 뒤집습니다. 그가 보기에 '나'는 관계보다 먼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먼저 있고, 그 사이에서 비로소 '나'가 생겨납니다. 그는 이 사이를 ‘아이다(あいだ)’라 불렀습니다.
아이다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리는 이미 양쪽에 두 사람이 있어야 놓을 수 있습니다. 기무라의 아이다는 그보다 앞섭니다. 나와 너를 있게 하는 근원적인 바탕이 먼저 있고, 그 바탕에서 나와 너가 나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본인이 예로부터 인간을 '사이에 있는 존재'로 이해해왔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인간(人間)'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 사이'를 뜻합니다.
'마(間)'라는 오래된 감각
이 '사이'의 감각은 기무라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에는 오래전부터 '사이'를 소중히 여기는 감각이 있었습니다.
일본어에서 이 글자는 '마(間)'로도 읽힙니다. 음악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 그림에서 그려지지 않은 여백, 건축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 대화에서 말과 말 사이의 뜸. 이 비어 있는 사이가 오히려 전체를 살아 있게 만든다는 감각입니다. 서예의 여백이 글씨만큼 중요하고, 다도에서 동작과 동작 사이의 고요가 차만큼 중요합니다.
기무라는 이 문화적 감각을 인간 존재의 근본 구조로 끌어올렸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비어 있는 자리가, 실은 관계가 살아 있는 바로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채워진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그 사이에서, 만남이 일어납니다.
사이가 무너질 때
기무라 빈은 사상가이기 전에 임상 의사였습니다. 그가 아이다를 사유하게 된 것은 책상이 아니라 진료실에서였습니다.
그는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을 오래 만나면서, 그들이 겪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바로 이 '사이'의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나와 타인 사이의 그 살아 있는 관계, 나와 세계 사이의 자연스러운 이어짐이 흔들릴 때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마음의 병은 한 개인의 내부에서 고장 난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존재하는 그 '사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관점은 마음을 보는 눈을 바꿉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 머릿속에, 개인의 안쪽에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기무라가 보기에 마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그 사이가 살아 있다는 뜻이고, 병든다는 것은 그 사이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서양의 '사이'와 만나는 자리
기무라 빈이 서양에서 주목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아이다는 서양 철학이 오래 씨름해온 주제와 놀랍도록 가까이 닿아 있었습니다.
마르틴 부버는 '나-너'의 만남을 이야기하며 그 만남이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몸과 몸이 얽히는 상호신체성을 말했습니다. 위니콧은 나와 너 사이의 '잠재적 공간'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언어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기무라의 아이다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서양 이론의 번역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언어와 감각에서 자라났다는 점입니다. 부버가 철학으로 애써 도달한 자리에, 동아시아인은 '사이가 좋다'는 일상의 말로 이미 서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서양이 개인에서 출발해 관계로 나아가야 했다면, 동아시아는 처음부터 사이에서 출발했습니다.
놀이가 일어나는 사이
이 관점으로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놀이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가 달리 보입니다.
함께 노는 두 아이를 떠올려 봅니다. 놀이는 어느 한 아이의 머릿속에 있지 않습니다. 상대 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놀이는 두 아이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주고받는 눈빛과 웃음과 몸짓 사이, 다가갔다 물러나는 거리 사이, 그 비어 있는 자리에서 놀이가 살아 움직입니다. 그리고 기무라의 말을 빌리면, 그렇게 함께 노는 사이에서 아이는 '나'가 되어갑니다. 혼자 완성된 아이가 나와서 노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노는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 빚어집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함께 놀 사이를 지켜준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를 만들어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가 '나'로 자라날 수 있는 자리를 지켜주는 일입니다.
사이를 잃어가는 시대
기무라 빈이 남긴 물음은 오늘 날 더 깊이 와닿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점점 얇아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화면을 통해 이어지지만 그 사이에는 눈빛도, 침묵도, 거리도, 몸의 뜸도 없습니다. 채워진 정보만 오갈 뿐, 비어 있는 그 살아 있는 사이가 사라집니다. 기무라가 마음의 위기로 보았던 바로 그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끊어짐이 조용히 일상이 되어갑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관계의 양이 아니라, 사이의 질일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사이에 눈빛과 침묵과 거리가, 그 살아 있는 여백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어를 쓰는 우리는, 그 '사이'라는 말을 이미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 글은 기무라 빈(木村敏, 1931–2021)의 '아이다(あいだ)' 개념을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人と人との間)』(1972)가 있으며, 그의 사유는 서양 현상학과 니시다 기타로를 비롯한 일본 철학의 만남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의 저작 중 일부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