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이 알려주는 것
두 손을 맞잡아 봅니다. 오른손이 왼손을 만집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감각을 일깨워보면, 이번에는 왼손이 오른손에게 만져지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다시 주의를 돌리면 만지는 손과 만져지는 손이 바뀝니다. 두 감각은 아주 가깝게 붙어 있지만 동시에 인식 되지는 않습니다.
내 몸은 만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만져지는 존재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면서, 세계 안에 놓인 하나의 사물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이 사소한 경험을 면밀히 관찰하고 사유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에 낸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에서,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붙잡아온 견고한 믿음에 균열을 내기 시작합니다.
마음과 몸은 따로 있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한쪽에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다른 쪽에 물리적인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판단하고 인식하고, 몸은 그 마음을 실어 나르는 기계처럼 여겨졌습니다. 눈은 카메라처럼 빛을 받아들이고, 뇌가 그 정보를 처리해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냅니다. 세계를 아는 것은 결국 머리가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이 그림이 우리가 실제로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과 맞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컵을 향해 손을 뻗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컵까지의 거리를 재고, 팔의 각도를 계산하고, 손가락을 벌릴 폭을 정하지 않습니다. 일단 손이 갑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몸은 마음의 명령을 기다리는 기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세계를 이해하는 고유한 존재입니다.
몸은 세계를 향해 있습니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몸은 해부학적인 몸이 아닙니다. 무게와 부피를 가진 물체로서의 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세계를 향해 있는 몸입니다. 그는 이것을 ‘살아 있는 몸(corps vécu / lived body)’이라 불렀습니다.
이 몸에게 세계는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들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의자를 보면서 '앉을 수 있음'을 함께 봅니다. 문고리를 보면서 '돌릴 수 있음'을 봅니다. 아이는 나무를 보며 '오를 수 있음'을 보고, 웅덩이를 보며 '뛰어넘을 수 있음'을 봅니다. 사물의 성질을 먼저 인식한 다음 용도를 추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먼저 그것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그는 이 몸의 지향을 ‘작동하는 지향성(intentionnalité opérante / operative intentionality)’이라 불렀습니다. 생각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몸이 세계와 맺는 의미의 관계입니다.
이 몸은 도구도 자기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오래 쓴 지팡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더 이상 손에 쥔 물건이 아닙니다. 지팡이 끝이 그의 감각이 닿는 자리가 됩니다. 목수의 망치도, 운전자가 느끼는 타이어 밑의 노면도 그렇습니다. 몸은 자기 경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몸이 터득한 지식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에게 그 방법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대개 말문이 막힙니다. 분명히 알고 있는데 말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지식이 부족한 상태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종류의 지식일 뿐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아는 것, 개념이 아니라 습관으로 새겨진 것. 그는 몸이 세계와 만나며 만들어가는 이 도식을 ‘몸 도식(schéma corporel / body schema)’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도 손이 어디 있는지 압니다. 낮은 문틀 아래로 고개를 숙일 때 자를 대보지 않습니다. 몸은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배울수록 쌓입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힌다는 것은 지식을 머리에 저장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만나는 몸의 방식이 확장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몸에 대한 이해
『지각의 현상학』이 놓은 이 토대 위에서, 메를로퐁티는 말년에 더 멀리 나아갑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964년에 나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이 사유는 다른 사람의 몸에까지 가닿습니다.
내 몸이 만지면서 동시에 만져지는 것이라면,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도 나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이는 자이면서 보는 자입니다. 나와 당신은 서로 다른 세계에 갇힌 두 개의 마음이 아니라, 같은 살로 이루어진 세계에 함께 속해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이 얽힘을 ‘상호신체성(intercorporéité / intercorporeality)’이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상대의 숨은 마음을 추론해서가 아닙니다. 나의 몸과 당신의 몸이 이미 같은 질감의 세계 안에서 서로를 향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몸짓을 볼 때 나는 그 의미를 해석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 사람의 의도가 내 몸에 깃들고, 내 의도가 그의 몸에 깃든 것처럼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놀이터에 존재하는 몸
이 철학을 알고 나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의 몸이 달리 보입니다.
정글짐에 오르는 아이는 봉의 굵기와 자기 손의 크기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손이 뻗어 나가고 발이 저절로 자리를 찾습니다. 다음 봉이 잡을 만한지 아닌지를 몸이 먼저 압니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하는 일은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아이와 함께 놀 때는 여기에 하나가 더해집니다.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는 상대가 어느 쪽으로 꺾을지 머리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몸이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함께 시소를 타는 두 아이는 서로의 무게를 느끼며 균형을 찾습니다. 상대의 몸이 내 몸 안에서 함께 움직입니다.
메를로퐁티의 눈으로 보면, 아이들이 몸으로 뒤엉켜 노는 시간은 세계를 알아가는 일차적인 방식을 적극적으로 익히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알아가는 일차적인 방식을 익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몸으로 터득하는 지식을 잃어가는 인간의 시대
메를로퐁티는 화면 앞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시대를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오늘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점점 몸을 쓰지 않고 세계를 만납니다. 손가락 하나로 사물을 부르고, 화면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거리를 재는 대신 지도가 알려주는 숫자를 봅니다. 몸이 세계를 향해 기울어지고, 무게를 느끼고, 거리를 가늠하고, 다른 몸과 부딪히며 익히던 그 지식들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는 걸까요.
메를로퐁티가 평생 지키려 한 것은 우리는 몸을 가진 채로 세계에 속해 있고, 몸으로 세계를 알고, 몸으로 서로를 만난다는 단순한 주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몸이 세계를 배우는 부차적인 통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통로라는 겁니다.
아이가 몸으로 세계를 만나고 다른 아이와 부딪히며 노는 시간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잃는 것은 비단 운동량이나 체력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Maurice Merleau-Ponty의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의 핵심 아이디어를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상호신체성(intercorporéité) 개념은 그의 유고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1964)』에서 더 깊이 전개되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이 알려주는 것
두 손을 맞잡아 봅니다. 오른손이 왼손을 만집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감각을 일깨워보면, 이번에는 왼손이 오른손에게 만져지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다시 주의를 돌리면 만지는 손과 만져지는 손이 바뀝니다. 두 감각은 아주 가깝게 붙어 있지만 동시에 인식 되지는 않습니다.
내 몸은 만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만져지는 존재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면서, 세계 안에 놓인 하나의 사물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이 사소한 경험을 면밀히 관찰하고 사유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에 낸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에서,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붙잡아온 견고한 믿음에 균열을 내기 시작합니다.
마음과 몸은 따로 있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한쪽에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다른 쪽에 물리적인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판단하고 인식하고, 몸은 그 마음을 실어 나르는 기계처럼 여겨졌습니다. 눈은 카메라처럼 빛을 받아들이고, 뇌가 그 정보를 처리해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냅니다. 세계를 아는 것은 결국 머리가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메를로퐁티는 이 그림이 우리가 실제로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과 맞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컵을 향해 손을 뻗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컵까지의 거리를 재고, 팔의 각도를 계산하고, 손가락을 벌릴 폭을 정하지 않습니다. 일단 손이 갑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몸은 마음의 명령을 기다리는 기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세계를 이해하는 고유한 존재입니다.
몸은 세계를 향해 있습니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몸은 해부학적인 몸이 아닙니다. 무게와 부피를 가진 물체로서의 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세계를 향해 있는 몸입니다. 그는 이것을 ‘살아 있는 몸(corps vécu / lived body)’이라 불렀습니다.
이 몸에게 세계는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들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의자를 보면서 '앉을 수 있음'을 함께 봅니다. 문고리를 보면서 '돌릴 수 있음'을 봅니다. 아이는 나무를 보며 '오를 수 있음'을 보고, 웅덩이를 보며 '뛰어넘을 수 있음'을 봅니다. 사물의 성질을 먼저 인식한 다음 용도를 추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먼저 그것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그는 이 몸의 지향을 ‘작동하는 지향성(intentionnalité opérante / operative intentionality)’이라 불렀습니다. 생각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몸이 세계와 맺는 의미의 관계입니다.
이 몸은 도구도 자기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오래 쓴 지팡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더 이상 손에 쥔 물건이 아닙니다. 지팡이 끝이 그의 감각이 닿는 자리가 됩니다. 목수의 망치도, 운전자가 느끼는 타이어 밑의 노면도 그렇습니다. 몸은 자기 경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몸이 터득한 지식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에게 그 방법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대개 말문이 막힙니다. 분명히 알고 있는데 말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지식이 부족한 상태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종류의 지식일 뿐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아는 것, 개념이 아니라 습관으로 새겨진 것. 그는 몸이 세계와 만나며 만들어가는 이 도식을 ‘몸 도식(schéma corporel / body schema)’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고도 손이 어디 있는지 압니다. 낮은 문틀 아래로 고개를 숙일 때 자를 대보지 않습니다. 몸은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배울수록 쌓입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힌다는 것은 지식을 머리에 저장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만나는 몸의 방식이 확장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몸에 대한 이해
『지각의 현상학』이 놓은 이 토대 위에서, 메를로퐁티는 말년에 더 멀리 나아갑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964년에 나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이 사유는 다른 사람의 몸에까지 가닿습니다.
내 몸이 만지면서 동시에 만져지는 것이라면,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도 나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이는 자이면서 보는 자입니다. 나와 당신은 서로 다른 세계에 갇힌 두 개의 마음이 아니라, 같은 살로 이루어진 세계에 함께 속해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이 얽힘을 ‘상호신체성(intercorporéité / intercorporeality)’이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상대의 숨은 마음을 추론해서가 아닙니다. 나의 몸과 당신의 몸이 이미 같은 질감의 세계 안에서 서로를 향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몸짓을 볼 때 나는 그 의미를 해석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 사람의 의도가 내 몸에 깃들고, 내 의도가 그의 몸에 깃든 것처럼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놀이터에 존재하는 몸
이 철학을 알고 나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의 몸이 달리 보입니다.
정글짐에 오르는 아이는 봉의 굵기와 자기 손의 크기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손이 뻗어 나가고 발이 저절로 자리를 찾습니다. 다음 봉이 잡을 만한지 아닌지를 몸이 먼저 압니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하는 일은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아이와 함께 놀 때는 여기에 하나가 더해집니다.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는 상대가 어느 쪽으로 꺾을지 머리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몸이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함께 시소를 타는 두 아이는 서로의 무게를 느끼며 균형을 찾습니다. 상대의 몸이 내 몸 안에서 함께 움직입니다.
메를로퐁티의 눈으로 보면, 아이들이 몸으로 뒤엉켜 노는 시간은 세계를 알아가는 일차적인 방식을 적극적으로 익히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알아가는 일차적인 방식을 익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몸으로 터득하는 지식을 잃어가는 인간의 시대
메를로퐁티는 화면 앞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시대를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오늘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점점 몸을 쓰지 않고 세계를 만납니다. 손가락 하나로 사물을 부르고, 화면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거리를 재는 대신 지도가 알려주는 숫자를 봅니다. 몸이 세계를 향해 기울어지고, 무게를 느끼고, 거리를 가늠하고, 다른 몸과 부딪히며 익히던 그 지식들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는 걸까요.
메를로퐁티가 평생 지키려 한 것은 우리는 몸을 가진 채로 세계에 속해 있고, 몸으로 세계를 알고, 몸으로 서로를 만난다는 단순한 주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몸이 세계를 배우는 부차적인 통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통로라는 겁니다.
아이가 몸으로 세계를 만나고 다른 아이와 부딪히며 노는 시간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잃는 것은 비단 운동량이나 체력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Maurice Merleau-Ponty의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의 핵심 아이디어를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상호신체성(intercorporéité) 개념은 그의 유고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1964)』에서 더 깊이 전개되었습니다.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