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면역학 박사, 사회 비평가, 정치활동가, 저널리스트, 페미니스트인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지은 '건강의 배신'의 원제는 <Natural Causes: An Epidemic of Wellness, the Certainty of Dying, and Killing Ourselves to Live Longer> 인데, <자연적 원인들: 웰니스라는 전염병, 죽음의 확실성, 그리고 더 오래 살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는 우리>로 번역할 수 있기도 합니다.

나는 몸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지지하는 최신 과학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몸은 잘 정비된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한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될, 세포의 지속적인 갈등이 일어나는 장소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책의 끝에서(삶의 끝은 아니더라도)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자아라는 것이 조화로 운 몸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자아란 무엇인가? 게다가 무엇을 위해 자아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 책에는 수명을 늘리고, 식단과 운동요법을 개선하고, 더욱 건강한 태도를 갖게 해 줄 ‘실용적’ 지침이나 비결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이 책이 몸과 마음을 향한 통제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한다. 문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프로젝트에 투입해야 하는가에 있다.
나는 진료 예약을 한 뒤 그를 직접 만나 이렇게 말했다. 첫째, 보다 풍족하지 않은 사람들, 다시 말해 그의 진료 대기실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외면하려 하는 것에 대해 커다란 실망감을 느낀다. 둘째, 나는 더 많은 검사를 원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검사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의사를 원한다. 나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 당신이 아무렇게나 검진하는 환자들 쪽에 남겠다. 사람들이 불필요한 검진과 검사를 받는 것은 물론 의사들이 그렇게 진단하기 때문이다. 과잉 진단은 종종 ‘유행병'으로 불리며, 공적인 의료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졸라나 일리치 같은 비판적 사상가들에 따르면, 의료적 의례의 기능 중 하나는 ‘사회적 통제’다. 의료 현장에서의 만남은 흔히 사회적 지위의 격차를 드러내며 이루어진다. 지난 수십 년간 이민자 출신 의사와 여성 의사가 늘긴 했지만, 의사는 대체로 교육받고 부유한 백인 남성들일 가능성이 크며, 환자가 그들과 만날 때는 옷을 벗거나 자기 몸에 있는 구멍에 무언가를 삽입하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등 복종 행동(submissive behavior)을 취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는 강제 알몸 수색처럼 형사 사법 체계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과 같은 것으로, 당하는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 주려는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는 행위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의사와 환자는 마치 중국 황제를 알현할 때 머리를 조아리며 존경을 표현하는 고두(叩頭)와 흡사한, 지배와 복종의 의례를 재연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자존감’이라는 말은 매우 종교적인 속성을 띠기까지 한다. 우리는 자신을 ‘믿고’,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진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라’고 배운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그 누가 우리를 사랑하겠느냐는 것이다. 20세기에 번창하기 시작한 끝없는 ‘자기계발’적 조언들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라고 명한다. 자신을 충족시키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고, 때로는 자신을 ‘축하해 주라’는 것이다. 이제 ‘믿음’ 같은 단어들도 종교적 입장을 충분히 연상시키지 않는 가운데, 한 사이트에서는 자신만의 성지를 만들어서 ‘스스로를 숭배하라’고 권한다. 그 성지에는 사진(아마도 셀카), 좋아하는 장신구들, 그리고 향수, 양초, 향료 같은 ‘좋은 향기가 나는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자아는 분명 사람들이 숭배하는, 만들어진 신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종교들이 소중하게 모시는 신과 다르지 않다. 자아도 신도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믿음’의 발휘를 요구한다.
세포면역학 박사, 사회 비평가, 정치활동가, 저널리스트, 페미니스트인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지은 '건강의 배신'의 원제는 <Natural Causes: An Epidemic of Wellness, the Certainty of Dying, and Killing Ourselves to Live Longer> 인데, <자연적 원인들: 웰니스라는 전염병, 죽음의 확실성, 그리고 더 오래 살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는 우리>로 번역할 수 있기도 합니다.
나는 몸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지지하는 최신 과학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몸은 잘 정비된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한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될, 세포의 지속적인 갈등이 일어나는 장소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책의 끝에서(삶의 끝은 아니더라도)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자아라는 것이 조화로 운 몸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자아란 무엇인가? 게다가 무엇을 위해 자아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 책에는 수명을 늘리고, 식단과 운동요법을 개선하고, 더욱 건강한 태도를 갖게 해 줄 ‘실용적’ 지침이나 비결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이 책이 몸과 마음을 향한 통제 프로젝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한다. 문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 프로젝트에 투입해야 하는가에 있다.
나는 진료 예약을 한 뒤 그를 직접 만나 이렇게 말했다. 첫째, 보다 풍족하지 않은 사람들, 다시 말해 그의 진료 대기실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외면하려 하는 것에 대해 커다란 실망감을 느낀다. 둘째, 나는 더 많은 검사를 원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검사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의사를 원한다. 나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 당신이 아무렇게나 검진하는 환자들 쪽에 남겠다. 사람들이 불필요한 검진과 검사를 받는 것은 물론 의사들이 그렇게 진단하기 때문이다. 과잉 진단은 종종 ‘유행병'으로 불리며, 공적인 의료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졸라나 일리치 같은 비판적 사상가들에 따르면, 의료적 의례의 기능 중 하나는 ‘사회적 통제’다. 의료 현장에서의 만남은 흔히 사회적 지위의 격차를 드러내며 이루어진다. 지난 수십 년간 이민자 출신 의사와 여성 의사가 늘긴 했지만, 의사는 대체로 교육받고 부유한 백인 남성들일 가능성이 크며, 환자가 그들과 만날 때는 옷을 벗거나 자기 몸에 있는 구멍에 무언가를 삽입하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등 복종 행동(submissive behavior)을 취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는 강제 알몸 수색처럼 형사 사법 체계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과 같은 것으로, 당하는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 주려는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는 행위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의사와 환자는 마치 중국 황제를 알현할 때 머리를 조아리며 존경을 표현하는 고두(叩頭)와 흡사한, 지배와 복종의 의례를 재연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자존감’이라는 말은 매우 종교적인 속성을 띠기까지 한다. 우리는 자신을 ‘믿고’,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진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라’고 배운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그 누가 우리를 사랑하겠느냐는 것이다. 20세기에 번창하기 시작한 끝없는 ‘자기계발’적 조언들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라고 명한다. 자신을 충족시키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고, 때로는 자신을 ‘축하해 주라’는 것이다. 이제 ‘믿음’ 같은 단어들도 종교적 입장을 충분히 연상시키지 않는 가운데, 한 사이트에서는 자신만의 성지를 만들어서 ‘스스로를 숭배하라’고 권한다. 그 성지에는 사진(아마도 셀카), 좋아하는 장신구들, 그리고 향수, 양초, 향료 같은 ‘좋은 향기가 나는 물건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자아는 분명 사람들이 숭배하는, 만들어진 신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종교들이 소중하게 모시는 신과 다르지 않다. 자아도 신도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믿음’의 발휘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