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위험감수놀이란 무엇인가? (위험감수놀이의 정의) : Sandseter & Kennair (2011), "Children's Risky Play from an Evolutionary Perspective: The Anti-Phobic Effects of Thrilling Exper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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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감수놀이(risky play)'란 무엇일까요?

놀이터에서 아이가 정글짐 꼭대기를 향해 오릅니다. 한 칸, 또 한 칸. 어느새 어른 키를 훌쩍 넘긴 높이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아이는 부들부들 떨며 두 다리로 서보려 합니다. 아래에서 아이를 지켜보던 부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위험해, 내려와!"

그런데 그 순간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 보면, 마냥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눈은 잔뜩 집중해 있고, 손은 혹시나 떨어졌을 때 짚을 곳을 가늠하는 듯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아이는 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부모는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아이는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이 팽팽한 갈등을 노르웨이의 놀이 연구자 엘렌 산세터(Ellen Beate Hansen Sandseter)는 정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라이프 케네어와 함께 2011년에 낸 논문에서, 우리가 겁내온 그 위험한 놀이에 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위험을 찾아 나선다

산세터의 이야기의 출발점은 아이들은 위험을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 나선다는  관찰에서 시작됩니다.

아이들은 더 높이 오르고 싶어 하고, 더 빨리 미끄러지고 싶어 하고, 아슬아슬한 곳에 서 보고 싶어 합니다. 아무리 말려도 기어이 그곳으로 갑니다. 산세터는 이것을 아이가 똑똑하지 않아서나 부주의 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행동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위험감수놀이(risky play)’입니다. 다칠 수도 있는, 스릴 넘치고 흥분되는 형태의 놀이입니다.

그리고 그는 질문했습니다. 다칠 수도 있는 이 위험한 놀이를, 왜 세상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토록 하고 싶어 안달이 났을까. 진화는 정말 아이들에게 위험을 피하라고만 가르쳤을까?


여섯 가지 위험한 놀이

산세터는 아이들이 찾는 위험을 관찰해 여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높이 : 나무나 구조물 높은 곳에 오르고, 그 위에서 뛰어내리는 놀이 입니다.
  2. 빠른 속도 : 그네를 세게 구르고, 미끄럼틀을 빠르게 내려오고, 자전거로 내리막을 달리는 놀이입니다.
  3. 위험한 도구 : 칼, 톱, 망치, 밧줄처럼 다칠 수 있는 진짜 도구를 쓰는 놀이입니다.
  4. 위험한 요소 : 불, 물, 낭떠러지처럼 위험한 것들 곁에서 노는 놀이 입니다.
  5. 거친 신체놀이 : 서로 밀치고, 뒹굴고, 싸우는 시늉을 하며 몸을 부딪히는 놀이 입니다.
  6. 사라지기 : 어른의 시야에서 벗어나, 혼자 혹은 친구끼리 숨고 탐험하고 길을 잃어보는 놀이 입니다.

이 놀이를 떠올리면 양육자의 마음은 불편해집니다. 하나같이 "하지 마"라고 말리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산세터가 보기에, 바로 이것들이 아이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맞닿은 짜릿함

위험감수놀이의 핵심에는 복잡한 감정이 있습니다. 산세터는 이것을 ‘두려움에 맞닿은 짜릿함(exhilaration bordering on fear)’이라 불렀습니다.

높은 곳에 오른 아이는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움이야말로 아이가 찾던 것입니다. 아이는 즐거움과 공포가 만나는 바로 그 경계선을 향해 갑니다. 너무 안전하면 시시하고, 너무 위험하면 압도됩니다. 아이는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지점, 무섭지만 견딜 만한 그 자리를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아이는 무서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다루어 낼 수 있게 됩니다. 손에 힘을 주고, 호흡을 고르고, 한 발 더 내딛습니다. 공포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안은 채로 움직이는 법을 몸으로 익히는 것입니다.


위험한 놀이가 중요한 이유

산세터의 가장 중요한 주장이 여기 있습니다. 위험감수놀이에는 공포를 다스리는(anti-phobic)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는 이렇습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조금씩 높은 곳에 올라 그 무서움을 견뎌내는 경험을 반복하면, 그 공포는 점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불안을 치료하는 방식과 정확히 같습니다. 두려운 것을 조금씩, 다룰 수 있는 양만큼 마주하면서 그 두려움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아이는 놀이라는 안전한 틀 안에서, 스스로에게 꼭 맞는 분량의 공포를 처방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놀이를 빼앗으면 어떻게 될까요. 위험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오히려 더 불안한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빠른 속도에서, 낯선 상황에서 공포를 다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위험에서 완전히 보호하려는 마음이, 역설적으로 아이가 공포를 이겨낼 기회를 앗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험과 위해는 다르다

여기서 부모의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다치게 두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위험감수놀이를 이해하는 열쇠는 ‘위험(risk)’과 ‘위해(hazard)’를 구분하는 데 있습니다.

위험은 아이가 스스로 보고, 가늠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높이 오를지, 얼마나 빨리 내려갈지는 아이가 자기 몸으로 판단합니다. 아이는 대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갑니다.

위해는 다릅니다. 위해는 아이가 볼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는 숨은 함정입니다. 헐거워진 볼트, 부러질 나뭇가지, 바닥에 숨은 못. 아이는 이것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좋은 놀이 환경은 위험을 없애는 곳이 아니라, 위해를 없애고 위험은 남겨두는 곳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며 오를 수 있게 하되, 아이가 알 수 없는 함정은 어른이 미리 치워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할 일은 아이를 높은 곳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높은 곳이 안전하게 위험하도록 살펴주는 것입니다. 무섭게 보이는 것과 실제로 위험한 것을 구분하는 눈, 그것이 아이의 놀이를 지키는 어른의 감각입니다.


위험을 지워버린 세계

산세터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무겁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아이의 세계에서 위험을 지우는 일에 몰두해 왔습니다. 놀이터 바닥을 푹신하게 깔고, 모서리를 둥글게 갈고, 높이를 낮추고, "뛰지 마세요"를 붙였습니다. 남은 놀이는 화면 안으로 옮겨갔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몸이 아프지 않습니다. 무서움을 견디며 손에 힘을 줄 일도, 공포를 다뤄낼 일도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를 안전하게 지켰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산세터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아이가 공포를 이겨내는 법을 배울 자리를 함께 지워버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정글짐 꼭대기에 오른 아이는 무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무서움과 마주하고, 그것을 다뤄내고, 자기 몸을 믿는 법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잊어버린 무언가를 아직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두려움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마주하며 넘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글은 Ellen Beate Hansen Sandseter & Leif Edward Ottesen Kennair의 논문 "Children's Risky Play from an Evolutionary Perspective: The Anti-Phobic Effects of Thrilling Experiences" (Evolutionary Psychology, 2011)의 핵심 아이디어를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위험(risk)과 위해(hazard)의 구분은 위험감수놀이를 다루는 놀이 안전 논의에서 널리 쓰이는 개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