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erences]아서 클라인먼, <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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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돌봄의 영혼이란, 영혼의 돌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돌봄의 행위는 -원한다면 관계에서의 보살핌이라 말할 수 있는 것- 관계를 작동시키면서 자아를 다시 만들어간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은 서로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면서 감정과 의미 사이에 단단한 끈을 형성한다. 이 끈이 돌보는 사람의 에너지를 끌어내면서 행위의 목적과 열정을 다시 살린다. 협조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행동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도덕적으로 헌신하면 돌봄이라는 무거운 짐이 어느정도는 상쇄된다. 또한 관계의 질은 좋아지고, 자아의 역량은 강화된다. 때로는 관계가 나빠지고 자아가 약해지기도 한다.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진 않고 상승과 하강이 동시에 일어나며 시간, 건강 상태, 개인적 환경에 따라 관계는 강화되기도 약화되기도 한다.  


사람은 나쁜 시절과 좋은 시절을 모두 견뎌내며 성장한다.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라도 가장 내밀한 자아의 깊은 곳에서 자아의 도덕적, 감정적 형태가 진화한다. 그 도덕적, 감정적 자아를 우리는 영혼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기술적인 용어, 심리적 용어, 정신의학적 용어를 다 동원한다 해도 이것은 결국 영혼이라 불릴것이다. 영혼이란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갖는 실존적 의미다. 우리가 대표하는 것, 우리가 하는 일이다. 돌봄은 영혼이 하는 일과 관련되고,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모두의 영혼이 개입된다. 나는 돌봄이 자아와 관계를 가꾸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여기서 가꿈은 노동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노동은 다른사람에게 집중되고, 그 노동이 우리가 사람과 관계맺는 방식과 나를 조정해나가는 방식에 힘을 보탠다. 그 노동이 잘 될 경우 우리를 성숙시키고 연마하며, 잘 되지 않을 경우 우리를 고갈시키고 부담을 지운다. 마치 음과 양처럼 증가와 약화는 서로 반하면서도 상호 보완적이며 인간이 돌봄을 경험할 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작동한다. 


(중략) 나는 조앤이 되지 않았고 조앤이 될 수도 없었지만 그녀를 돌보는 일은 곧 나의 일부가 되어서 그 어렵고 끝나지 않는 돌봄이라는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괴롭고도 보람있는 그 일에서 나는 내 영혼을 찾았다. 내가 발견했거나 다시 만든 영혼이 망가지고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나에겐 돌봄이 불완전한 프로젝트라는 증거로 보인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단 한 가지 모습의 승리를 열망하지만 적어도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의 조건에서는 헤어 나올 수 있다. 인간의 조건이란 희망과 성취뿐만 아니라 실패와 무능을 헤쳐가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다면적이고 거추장스러운 현실을 헤쳐가는 과정이다. 


내 안의 인류학자는 돌봄이 지난 수천년동안 온갖 위험과 기회로 가득한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자연세계에서 인간이 적응해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돌봄은 사회적 고통과 역사적 변화라는 실제 위협에 대응하며 이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온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돌봄과 돌봄의 행위는 사랑과 구원을 탄생시켰고 또한 돌봄의 실패는 후회와 무능감을 낳았다.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돌봄을 인간 진화의 긴 여정으로 해석하는 것도 일견 합리적이지만 나의 경험 안에서 돌봄이란 어떤 현실과 어떤 시간에 사는 우리의 삶을 특징짓는 도덕적, 감정적 관계다. 민족지학은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돌봄은 그저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인생을 헤쳐나가기에 필요한 도구가 아니다. 이것은 목적과 열정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돌봄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을 만든다. 아름다움과 신성함의 원천이다. 선의 구현이며 인생을 깨달음과 연결시켜 주는 상징적이자 실질적인 다리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모순되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돌봄은 진실된 약속과 확고한 행동을 요구하는 흔치 않고 소중한 일이다. 우리가 돌봄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면, 역사도 돌봄 쪽으로 구부러지지 않을까? 당신과 나부터 그 일을 시작해 보면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