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들은 숫자와 데이터로만 내 몸을 읽는 듯했다. 여러 검사에도 불구하고 증세와 통증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원인이 없다는 이유로 내 증세와 통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갑상선센터 의사는 내 몸에서 갑상선만을, 내과 의사는 내 몸에서 현기증만을 보는 듯했다. 의사들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어서겠지만, 총체적으로 연결된 내 몸을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의료 전문인은 의사지만, 결국 내 몸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두려웠다.
하지만 내 몸은 로봇처럼 분리와 합체가 가능한 기계장치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다. 그런데 진료실에 앉아 있으면 내 몸은 해당 장기나 질병만 뚝 잘려서 현미경으로 관찰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느끼는 고통의 총량을 의사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각 진료과 의사들에게 갑상선암, 빈혈, 출혈 등의 개별 질병은 크게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그 모든 질병을 ‘동시에' 겪고 있는 내 몸은 불안과 통증으로 무겁게 짓눌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이해하는 의사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종합병원일수록 몸을 더욱 분절해서 볼 뿐, 내 몸에 대해 ‘종합적’으로 말해주는 곳은 없었다.
몸이 아프고 나서야 내가 ‘몸의 존재'임을 알았다.
몸을 돌본다는 것은 가사노동과 같아서, 해도 표가 안 나지만 하지 않으면 바로 표가 났다.
어느 날 식탁에 앉아 귤을 먹는데 온몸으로 귤 향기가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식이요법을 엄격히 지킬 때라 미각이 예민하고 맑은 상태여서 그랬던 것 같은데, 귤의 여러 맛이 느껴졌다. 달콤한 맛이 혀에서 머리와 목으로 스미는 것 같았고, 신맛이 등과 발끝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난생 처음 귤을 먹어본 사람처럼 온몸으로 그 맛이 느껴졌다. 마침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등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조금은 비현실적일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 순간, 잊고 있던 몸의 여러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듯했다. 통각이 아닌 몸의 다른 감각을 이렇듯 온몸으로 느낀 것이 얼마 만이었을까.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그 때 처음 생각헀다. 몸의 건강을 위한 운동이나 치료 말고, 몸의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중략)
음악과 몸의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막춤을 자주 추다 보니, 언젠가부터 통증과 질병에 갇혀 있던 몸이 조금씩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열려 꿈틀거리는 듯했고, 늘 천근만근 무거워서 싫기만 하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공기와 섞이며 유쾌한 기분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춤을 출수록 몸을 더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호흡에 따라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허리를 숙일 때 얼마나 많은 뼈와 근육이 협동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춤을 추다 보니, 내 몸에서 통증이나 질병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매 순간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내가 생존해나간다는 사실도 새롭게 발견했다. 수많은 근육과 조직의 움직임에 경이롭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의사들은 숫자와 데이터로만 내 몸을 읽는 듯했다. 여러 검사에도 불구하고 증세와 통증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원인이 없다는 이유로 내 증세와 통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갑상선센터 의사는 내 몸에서 갑상선만을, 내과 의사는 내 몸에서 현기증만을 보는 듯했다. 의사들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어서겠지만, 총체적으로 연결된 내 몸을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의료 전문인은 의사지만, 결국 내 몸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두려웠다.
하지만 내 몸은 로봇처럼 분리와 합체가 가능한 기계장치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다. 그런데 진료실에 앉아 있으면 내 몸은 해당 장기나 질병만 뚝 잘려서 현미경으로 관찰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느끼는 고통의 총량을 의사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각 진료과 의사들에게 갑상선암, 빈혈, 출혈 등의 개별 질병은 크게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그 모든 질병을 ‘동시에' 겪고 있는 내 몸은 불안과 통증으로 무겁게 짓눌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이해하는 의사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종합병원일수록 몸을 더욱 분절해서 볼 뿐, 내 몸에 대해 ‘종합적’으로 말해주는 곳은 없었다.
몸이 아프고 나서야 내가 ‘몸의 존재'임을 알았다.
몸을 돌본다는 것은 가사노동과 같아서, 해도 표가 안 나지만 하지 않으면 바로 표가 났다.
어느 날 식탁에 앉아 귤을 먹는데 온몸으로 귤 향기가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식이요법을 엄격히 지킬 때라 미각이 예민하고 맑은 상태여서 그랬던 것 같은데, 귤의 여러 맛이 느껴졌다. 달콤한 맛이 혀에서 머리와 목으로 스미는 것 같았고, 신맛이 등과 발끝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난생 처음 귤을 먹어본 사람처럼 온몸으로 그 맛이 느껴졌다. 마침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등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조금은 비현실적일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 순간, 잊고 있던 몸의 여러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듯했다. 통각이 아닌 몸의 다른 감각을 이렇듯 온몸으로 느낀 것이 얼마 만이었을까.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그 때 처음 생각헀다. 몸의 건강을 위한 운동이나 치료 말고, 몸의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중략)
음악과 몸의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막춤을 자주 추다 보니, 언젠가부터 통증과 질병에 갇혀 있던 몸이 조금씩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열려 꿈틀거리는 듯했고, 늘 천근만근 무거워서 싫기만 하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공기와 섞이며 유쾌한 기분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춤을 출수록 몸을 더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호흡에 따라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허리를 숙일 때 얼마나 많은 뼈와 근육이 협동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춤을 추다 보니, 내 몸에서 통증이나 질병 말고도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매 순간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내가 생존해나간다는 사실도 새롭게 발견했다. 수많은 근육과 조직의 움직임에 경이롭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