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세계를 그대로 비추는 걸까?
빨간 사과를 봅니다. 그 빨강은 사과에 원래부터 들어 있는 성질처럼 보입니다. 내가 보든 안 보든, 사과는 빨갛게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색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빨강은 사과 표면과, 그것을 비추는 빛과, 그 빛을 받아들이는 우리 눈의 구조가 함께 만들어낸 것입니다. 벌은 같은 꽃을 우리와 전혀 다른 색으로 봅니다. 색맹인 사람에게 그 사과는 또 다르게 보이는 존재입니다. 빨강은 사과 안에만 있는 것도, 우리 머릿속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와 몸이 만나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존재입니다.
세 명의 학자 — 신경과학자 프란시스코 바렐라, 철학자 에번 톰프슨, 인지심리학자 엘리너 로쉬 — 는 1991년에 『몸의 인지과학(The Embodied Mind)』이라는 책에서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마음이 세계를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그림을 다시 묻는 책입니다.

마음은 컴퓨터가 아닙니다
이 책이 나올 무렵, 인지과학의 주류에는 하나의 강력한 비유가 있었습니다. 마음은 컴퓨터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에 따르면, 바깥에는 이미 정해진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그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뇌는 그것을 처리해 머릿속에 세계의 모형을 만듭니다. 본다는 것은 바깥 세계를 안쪽에 그대로 옮겨 그리는 일입니다. 마음이 하는 일은 이미 있는 현실을 정확히 ‘표상(representation)’하는 것입니다.
세 저자는 이 비유를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앞의 사과 이야기처럼, 세계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완성되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지각하는가는, 우리가 어떤 몸을 가졌고 그 몸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는 행위 속에서 생겨납니다
세 저자는 자신들의 관점에 이름을 붙입니다. ‘enaction’입니다. 우리말로 옮기기 까다로운 말인데, '행위를 통해 불러낸다' 정도의 뜻입니다.
이들의 핵심 문장은 이렇습니다. 인지는 이미 주어진 세계를 이미 주어진 마음이 표상하는 일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가 세계와 주고받아온 행위의 역사 속에서 세계와 마음이 함께 생겨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방식이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결정하고,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다시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이끕니다. 지각과 행위는 두 개의 분리된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순환입니다. 눈은 그저 빛을 받아들이는 카메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초점을 맞추고, 다가가고, 만지면서 봅니다.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행위입니다.
걸으면서 길을 냅니다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걸으면서 길을 낸다(laying down a path in walking)’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길이 먼저 있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라는 정해진 길이 있고 우리는 그 위를 지나갈 뿐이라고. 그런데 이들은 반대로 말합니다. 걷는 행위가 길을 만든다고. 우리가 살아가며 세계와 주고받는 행위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의 모습을 그때그때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미리 놓인 길도 없고, 모든 것을 떠받치는 확고한 바닥도 없습니다. 세 저자는 이것을 ‘바닥 없음(groundlessness)’이라 불렀습니다. 처음 들으면 불안한 말입니다. 기댈 확실한 토대가 없다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들은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 바닥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가 열려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명상을 만나는 자리
이 책이 당시로서 다소 낯설었던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세 저자가 인지과학을 이야기하면서 불교의 명상 전통을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양 과학이 '마음'을 다루면서 정작 살아 있는 경험 자체는 빼놓았다고 보았습니다. 마음을 실험실에서 관찰하고 뇌를 촬영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느끼고 겪는 나의 실제 경험은 다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보기에 그 경험을 오랜 세월 정밀하게 살펴온 전통이 바로 명상 수행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이 주목한 것은 불교가 말하는 고정된 자아의 부재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변하지 않는 '나'라는 핵심이 있다고 느끼지만, 가만히 경험을 들여다보면 그런 고정된 중심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매 순간 조건에 따라 새로 생겨나는 흐름에 가깝습니다. 세계에 확고한 바닥이 없듯, 나에게도 확고한 중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발견은 상실이 아니라 자유일 수 있습니다.
놀이하는 몸
노는 아이의 몸은 이 책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이는 세계를 관찰한 다음 어떻게 놀지 계획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만지고, 던지고, 오르고, 넘어지면서 세계가 무엇인지 알아갑니다. 막대기는 손에 쥐어 휘둘러 보아야 칼이 되고, 웅덩이는 뛰어들어 보아야 그 깊이를 알게 됩니다. 아이에게 세계는 미리 완성된 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는 행위 속에서 그때그때 생겨납니다. 아이는 놀면서 세계를 불러냅니다.
세 저자의 말을 빌리면, 아이는 놀면서 자기 앞의 길을 냅니다. 정해진 세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세계와 주고받으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세계를 불러내 본 경험이, 세계를 이미 정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바탕이 됩니다.
몸으로 세계를 만나지 않는다면
이 책의 관점을 따라가면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아는 것이 몸의 행위를 통해서라면, 몸으로 세계와 주고받는 일이 줄어들 때 우리의 앎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화면 속 세계는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완성해둔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걷지 않고, 만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습니다. 길을 내는 대신 이미 놓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 저자가 나누고 싶었던 통찰은 우리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 적는 기계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참여자라는 것, 그리고 그 참여가 곧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몸으로 세계를 만나고 스스로 길을 내며 노는 시간이 줄어든다면, 우리가 잃는 것은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그 감각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Francisco Varela, Evan Thompson, Eleanor Rosch의 『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1991)의 핵심 아이디어를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이 책은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와 '발제(enaction)'라는 흐름을 연 고전으로 꼽힙니다.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
마음은 세계를 그대로 비추는 걸까?
빨간 사과를 봅니다. 그 빨강은 사과에 원래부터 들어 있는 성질처럼 보입니다. 내가 보든 안 보든, 사과는 빨갛게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색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빨강은 사과 표면과, 그것을 비추는 빛과, 그 빛을 받아들이는 우리 눈의 구조가 함께 만들어낸 것입니다. 벌은 같은 꽃을 우리와 전혀 다른 색으로 봅니다. 색맹인 사람에게 그 사과는 또 다르게 보이는 존재입니다. 빨강은 사과 안에만 있는 것도, 우리 머릿속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와 몸이 만나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존재입니다.
세 명의 학자 — 신경과학자 프란시스코 바렐라, 철학자 에번 톰프슨, 인지심리학자 엘리너 로쉬 — 는 1991년에 『몸의 인지과학(The Embodied Mind)』이라는 책에서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마음이 세계를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그림을 다시 묻는 책입니다.
마음은 컴퓨터가 아닙니다
이 책이 나올 무렵, 인지과학의 주류에는 하나의 강력한 비유가 있었습니다. 마음은 컴퓨터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에 따르면, 바깥에는 이미 정해진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그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뇌는 그것을 처리해 머릿속에 세계의 모형을 만듭니다. 본다는 것은 바깥 세계를 안쪽에 그대로 옮겨 그리는 일입니다. 마음이 하는 일은 이미 있는 현실을 정확히 ‘표상(representation)’하는 것입니다.
세 저자는 이 비유를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앞의 사과 이야기처럼, 세계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완성되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지각하는가는, 우리가 어떤 몸을 가졌고 그 몸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는 행위 속에서 생겨납니다
세 저자는 자신들의 관점에 이름을 붙입니다. ‘enaction’입니다. 우리말로 옮기기 까다로운 말인데, '행위를 통해 불러낸다' 정도의 뜻입니다.
이들의 핵심 문장은 이렇습니다. 인지는 이미 주어진 세계를 이미 주어진 마음이 표상하는 일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가 세계와 주고받아온 행위의 역사 속에서 세계와 마음이 함께 생겨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방식이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결정하고,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다시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이끕니다. 지각과 행위는 두 개의 분리된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순환입니다. 눈은 그저 빛을 받아들이는 카메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초점을 맞추고, 다가가고, 만지면서 봅니다.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행위입니다.
걸으면서 길을 냅니다
이 책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걸으면서 길을 낸다(laying down a path in walking)’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길이 먼저 있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라는 정해진 길이 있고 우리는 그 위를 지나갈 뿐이라고. 그런데 이들은 반대로 말합니다. 걷는 행위가 길을 만든다고. 우리가 살아가며 세계와 주고받는 행위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의 모습을 그때그때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미리 놓인 길도 없고, 모든 것을 떠받치는 확고한 바닥도 없습니다. 세 저자는 이것을 ‘바닥 없음(groundlessness)’이라 불렀습니다. 처음 들으면 불안한 말입니다. 기댈 확실한 토대가 없다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들은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 바닥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가 열려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명상을 만나는 자리
이 책이 당시로서 다소 낯설었던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세 저자가 인지과학을 이야기하면서 불교의 명상 전통을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양 과학이 '마음'을 다루면서 정작 살아 있는 경험 자체는 빼놓았다고 보았습니다. 마음을 실험실에서 관찰하고 뇌를 촬영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느끼고 겪는 나의 실제 경험은 다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보기에 그 경험을 오랜 세월 정밀하게 살펴온 전통이 바로 명상 수행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이 주목한 것은 불교가 말하는 고정된 자아의 부재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변하지 않는 '나'라는 핵심이 있다고 느끼지만, 가만히 경험을 들여다보면 그런 고정된 중심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매 순간 조건에 따라 새로 생겨나는 흐름에 가깝습니다. 세계에 확고한 바닥이 없듯, 나에게도 확고한 중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발견은 상실이 아니라 자유일 수 있습니다.
놀이하는 몸
노는 아이의 몸은 이 책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이는 세계를 관찰한 다음 어떻게 놀지 계획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만지고, 던지고, 오르고, 넘어지면서 세계가 무엇인지 알아갑니다. 막대기는 손에 쥐어 휘둘러 보아야 칼이 되고, 웅덩이는 뛰어들어 보아야 그 깊이를 알게 됩니다. 아이에게 세계는 미리 완성된 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는 행위 속에서 그때그때 생겨납니다. 아이는 놀면서 세계를 불러냅니다.
세 저자의 말을 빌리면, 아이는 놀면서 자기 앞의 길을 냅니다. 정해진 세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세계와 주고받으며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세계를 불러내 본 경험이, 세계를 이미 정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바탕이 됩니다.
몸으로 세계를 만나지 않는다면
이 책의 관점을 따라가면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아는 것이 몸의 행위를 통해서라면, 몸으로 세계와 주고받는 일이 줄어들 때 우리의 앎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화면 속 세계는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완성해둔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걷지 않고, 만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습니다. 길을 내는 대신 이미 놓인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 저자가 나누고 싶었던 통찰은 우리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 적는 기계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참여자라는 것, 그리고 그 참여가 곧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몸으로 세계를 만나고 스스로 길을 내며 노는 시간이 줄어든다면, 우리가 잃는 것은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그 감각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Francisco Varela, Evan Thompson, Eleanor Rosch의 『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1991)의 핵심 아이디어를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이 책은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와 '발제(enaction)'라는 흐름을 연 고전으로 꼽힙니다.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