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이를 정의하는 것이 가능은 할까?
놀이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교사는 아이가 놀면서 배우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노름판에 앉은 사람은 주사위가 굴러가는 순간을 떠올립니다. 축구선수는 상대를 제치는 스포츠의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말놀이를 떠올리고, 축제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무아지경으로 춤추던 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저 드라마를 보며 시간 낭비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놀이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정의를 만들려는 순간, 무언가를 반드시 놓치게 됩니다. 뉴질랜드 출신의 놀이 연구자 ‘브라이언 서튼스미스(Brian Sutton-Smith)’는 평생을 놀이 연구에 바친 뒤, 1997년에 『놀이의 모호성(The Ambiguity of Play)』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놀이를 정의하는 책이 아니라, 놀이가 왜 정의되지 않는지를 밝히는 책입니다.
우리는 놀이를 이야기할 때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서튼스미스가 주목한 것은 놀이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놀이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놀이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객관적인 이론을 제시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각자가 믿는 가치를 놀이에 끼워넣고 있습니다. 어떤 놀이는 중요하다고 치켜세우고, 어떤 놀이는 하찮다고 평가절하합니다. 무엇이 진짜 놀이인지를 정하는 그 손길 안에 이미 어떤 세계관이 들어 있습니다.
서튼스미스는 이런 이야기 방식들을 ‘수사(rhetorics)’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놀이를 둘러싼 담론에서 일곱 가지 수사를 찾아냅니다.
일곱 개의 이야기
진보(progress)의 수사. 놀이는 아이가 배우고 발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교육과 발달심리학이 가장 즐겨 쓰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놀이가 곧 배움"이라고 말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서사이기도 합니다.
운명(fate)의 수사. 놀이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에 몸을 맡기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사위, 제비뽑기, 도박. 이런 아주 오래된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됩니다.
권력(power)의 수사. 놀이는 겨루어 이기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경기, 시합, 승부. 누가 더 강한지를 가리는 자리로서의 놀이를 말합니다.
정체성(identity)의 수사. 놀이는 공동체가 자기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축제, 의례, 함께하는 놀이. 놀이를 통해 '우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상상(the imaginary)의 수사. 놀이는 창조성과 유연성의 원천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술, 환상, 가상의 세계. 낭만주의가 즐겨 쓰는 이야기입니다.
자아(the self)의 수사. 놀이는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누리는 즐거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취미, 몰입, 짜릿함. 현대의 개인이 가장 익숙하게 떠올리는 이야기입니다.
하찮음(frivolity)의 수사. 놀이는 결국 쓸데없는 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서튼스미스는 이 서사가 단순히 놀이를 비하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찮음의 수사는 앞의 이야기들에 맞서는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어릿광대와 익살꾼처럼, 진지함의 질서를 뒤흔드는 자리입니다.
이 일곱 중 운명, 권력, 정체성은 오래된 이야기이고 집단에 무게를 둡니다. 진보, 상상, 자아는 근대의 이야기이고 개인에 무게를 둡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놀이를 이야기하는 방식도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의 놀이를 말할 때
서튼스미스가 특히 주목한 것은 진보의 수사입니다.
아이의 놀이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이 수사를 씁니다. 놀이가 좋다고 말하기 위해 놀이가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놀이를 통해 언어를 배우고, 사회성을 기르고, 문제 해결력을 키운다고 말합니다. 놀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조차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서튼스미스는 여기서 묻습니다. 아이들이 정말 발달하기 위해 노는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실제로 하는 일들을 보면, 그것은 어른들이 그리는 유익한 그림과 잘 맞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서로를 놀리고, 무섭게 하고, 규칙을 어기고, 잔인한 농담을 하고, 어른이 보면 눈살을 찌푸릴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아이들의 놀이에는 어른이 정리해준 교훈으로 환원되지 않는 거칠고 어두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놀이는 배움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놀이를 옹호하는 동시에 놀이에 목줄을 채우고 길들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른의 목적에 맞는 놀이만 진짜 놀이로 인정하면서 말입니다.
모호함은 결함이 아닙니다
책의 제목이 왜 '모호한 놀이’인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놀이는 한 가지 정의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놀이 연구가 아직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놀이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이는 진짜이면서 진짜가 아니고, 자유로우면서 규칙에 매여 있고, 즐거우면서 때로 무자비하고, 무의미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서튼스미스는 이 뒤섞임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책의 끝에서 언급하는 이야기는 ‘변이(variability)’에 관한 것입니다. 놀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변주가 필요하듯, 인간의 마음도 굳어지지 않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한 번 잘 적응한 방식은 굳어지기 쉽고, 굳어진 것은 예상치 못한 변화 앞에서 쉬이 무너지고 맙니다. 놀이는 그 굳어짐(rigidity)을 흐트러뜨립니다. 쓸데없어 보이는 그 다양함이야말로, 인간이 유연한 존재로 남아 있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놀이를 지킨다는 것
서튼스미스의 책을 읽고 나면 놀이를 옹호하는 말이 조금 조심스러워집니다.
놀이가 좋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아이의 발달에 좋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놀이는 어떻게 되는가. 아이들이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놀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놀이, 어른의 눈에 위험하고 이상해 보이는 놀이는 지켜줄 필요가 없는가.
서튼스미스가 남긴 물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놀이를 옹호하기 위해 놀이를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가. 놀이가 아무 쓸모없어도, 그저 아이가 즐겁고 살아 있기 때문에 지켜줄 수는 없을까.
그는 놀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놀이를 이야기하는 우리의 현주소를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놀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놀이를 하나의 이야기 안에 가두지 않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Brian Sutton-Smith의 『The Ambiguity of Play』(1997)에 담긴 일곱 가지 놀이 수사(rhetorics of play)와 그 핵심 논지를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놀이를 정의하는 것이 가능은 할까?
놀이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교사는 아이가 놀면서 배우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노름판에 앉은 사람은 주사위가 굴러가는 순간을 떠올립니다. 축구선수는 상대를 제치는 스포츠의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노는 말놀이를 떠올리고, 축제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무아지경으로 춤추던 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저 드라마를 보며 시간 낭비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놀이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정의를 만들려는 순간, 무언가를 반드시 놓치게 됩니다. 뉴질랜드 출신의 놀이 연구자 ‘브라이언 서튼스미스(Brian Sutton-Smith)’는 평생을 놀이 연구에 바친 뒤, 1997년에 『놀이의 모호성(The Ambiguity of Play)』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놀이를 정의하는 책이 아니라, 놀이가 왜 정의되지 않는지를 밝히는 책입니다.
우리는 놀이를 이야기할 때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서튼스미스가 주목한 것은 놀이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놀이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놀이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객관적인 이론을 제시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각자가 믿는 가치를 놀이에 끼워넣고 있습니다. 어떤 놀이는 중요하다고 치켜세우고, 어떤 놀이는 하찮다고 평가절하합니다. 무엇이 진짜 놀이인지를 정하는 그 손길 안에 이미 어떤 세계관이 들어 있습니다.
서튼스미스는 이런 이야기 방식들을 ‘수사(rhetorics)’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놀이를 둘러싼 담론에서 일곱 가지 수사를 찾아냅니다.
일곱 개의 이야기
진보(progress)의 수사. 놀이는 아이가 배우고 발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교육과 발달심리학이 가장 즐겨 쓰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놀이가 곧 배움"이라고 말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서사이기도 합니다.
운명(fate)의 수사. 놀이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에 몸을 맡기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사위, 제비뽑기, 도박. 이런 아주 오래된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됩니다.
권력(power)의 수사. 놀이는 겨루어 이기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경기, 시합, 승부. 누가 더 강한지를 가리는 자리로서의 놀이를 말합니다.
정체성(identity)의 수사. 놀이는 공동체가 자기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축제, 의례, 함께하는 놀이. 놀이를 통해 '우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상상(the imaginary)의 수사. 놀이는 창조성과 유연성의 원천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술, 환상, 가상의 세계. 낭만주의가 즐겨 쓰는 이야기입니다.
자아(the self)의 수사. 놀이는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 누리는 즐거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취미, 몰입, 짜릿함. 현대의 개인이 가장 익숙하게 떠올리는 이야기입니다.
하찮음(frivolity)의 수사. 놀이는 결국 쓸데없는 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서튼스미스는 이 서사가 단순히 놀이를 비하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찮음의 수사는 앞의 이야기들에 맞서는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어릿광대와 익살꾼처럼, 진지함의 질서를 뒤흔드는 자리입니다.
이 일곱 중 운명, 권력, 정체성은 오래된 이야기이고 집단에 무게를 둡니다. 진보, 상상, 자아는 근대의 이야기이고 개인에 무게를 둡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놀이를 이야기하는 방식도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의 놀이를 말할 때
서튼스미스가 특히 주목한 것은 진보의 수사입니다.
아이의 놀이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이 수사를 씁니다. 놀이가 좋다고 말하기 위해 놀이가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놀이를 통해 언어를 배우고, 사회성을 기르고, 문제 해결력을 키운다고 말합니다. 놀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조차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서튼스미스는 여기서 묻습니다. 아이들이 정말 발달하기 위해 노는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실제로 하는 일들을 보면, 그것은 어른들이 그리는 유익한 그림과 잘 맞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서로를 놀리고, 무섭게 하고, 규칙을 어기고, 잔인한 농담을 하고, 어른이 보면 눈살을 찌푸릴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아이들의 놀이에는 어른이 정리해준 교훈으로 환원되지 않는 거칠고 어두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놀이는 배움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놀이를 옹호하는 동시에 놀이에 목줄을 채우고 길들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른의 목적에 맞는 놀이만 진짜 놀이로 인정하면서 말입니다.
모호함은 결함이 아닙니다
책의 제목이 왜 '모호한 놀이’인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놀이는 한 가지 정의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놀이 연구가 아직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놀이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이는 진짜이면서 진짜가 아니고, 자유로우면서 규칙에 매여 있고, 즐거우면서 때로 무자비하고, 무의미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서튼스미스는 이 뒤섞임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책의 끝에서 언급하는 이야기는 ‘변이(variability)’에 관한 것입니다. 놀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변주가 필요하듯, 인간의 마음도 굳어지지 않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한 번 잘 적응한 방식은 굳어지기 쉽고, 굳어진 것은 예상치 못한 변화 앞에서 쉬이 무너지고 맙니다. 놀이는 그 굳어짐(rigidity)을 흐트러뜨립니다. 쓸데없어 보이는 그 다양함이야말로, 인간이 유연한 존재로 남아 있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놀이를 지킨다는 것
서튼스미스의 책을 읽고 나면 놀이를 옹호하는 말이 조금 조심스러워집니다.
놀이가 좋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아이의 발달에 좋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놀이는 어떻게 되는가. 아이들이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놀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놀이, 어른의 눈에 위험하고 이상해 보이는 놀이는 지켜줄 필요가 없는가.
서튼스미스가 남긴 물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놀이를 옹호하기 위해 놀이를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가. 놀이가 아무 쓸모없어도, 그저 아이가 즐겁고 살아 있기 때문에 지켜줄 수는 없을까.
그는 놀이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놀이를 이야기하는 우리의 현주소를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놀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놀이를 하나의 이야기 안에 가두지 않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Brian Sutton-Smith의 『The Ambiguity of Play』(1997)에 담긴 일곱 가지 놀이 수사(rhetorics of play)와 그 핵심 논지를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