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아이를 그네에 태우고 밀어줍니다. 손은 기계적으로 그네를 밀지만, 머릿속으로는 내일 회사에서 할 일을 생각하고, 한 손으로는 휴대폰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아이는 분명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 아이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뒤를 돌아봅니다. 고개를 든 나와 아이의 눈이 마주칩니다. 아주 짧은 순간, 회사 업무도 휴대폰도 사라지고, 세상에는 오직 웃고 있는 이 아이와 나만 남습니다.
같은 상황 속의, 같은 두 사람인데 무언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바로 이 차이가 인간이 존재하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1923년에 쓰인 그의 얇지만 깊이 있는 책, 『나와 너(Ich und Du)』 를 소개합니다.

세계를 대하는 두 개의 '근원어(Grundworte)'
부버는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두 개로 나눕니다. 그리고 이를 '근원어(Grundworte)'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가 단순한 단어를 넘어, 입 밖에 내는 순간 하나의 존재 방식을 세우는 말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두 근원어는 바로 '나-그것(Ich-Es / I-It)'과 '나-너(Ich-Du / I-Thou)'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세트에서의 '나'조차 같은 '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을 대하는 나와 '너'를 대하는 나는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관계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됩니다.
'그것(Es)'의 세계
'나-그것'의 관계에서, 나는 상대를 하나의 대상으로 다룹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사용합니다. 그 대상은 여러 사물 중 하나이고, 나에게 쓸모나 정보로 존재합니다. 부버는 이것을 '경험(Erfahrung)'의 세계라 불렀습니다.
이 세계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물건을 사고, 길을 찾고, 일을 처리하는 모든 순간이 '나-그것'의 세계 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사람마저 '그것'으로 대한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할 프로젝트'로, 동료를 '쓸모 있는 자원'으로, 눈앞의 사람을 '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볼 때, 우리는 나-그것의 세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라면, 우리 내면의 뭔가 중요한 것이 서서히 죽어가고 맙니다.
'너(Du)'의 세계
'나-너'의 관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관계에서 '나'는 상대를 온전한 존재로 만납니다(Begegnung). 상대는 더 이상 여러 흔한 사물 중 하나가 아니라, 내 앞에 온전히 마주 선 하나의 현존이 됩니다. '나'는 '그'를 경험하거나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주하고 함께 관계(Beziehung) 안에 섭니다.
부버 철학의 가장 핵심 문장이 이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삶은 만남이다(Alles wirkliche Leben ist Begegnung)." 그네 위에서 아이와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잡생각이 사라지고 오직 아이와 나만 남았던 그 순간이 바로 '나-너'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은 분석이 아닌 현존이고,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Gegenwart)'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를 통해 '나'가 됩니다
부버는 또 이렇게 말 합니다. 우리는 먼저 완성된 '나'로 존재한 후에 남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남을 통해 비로소 '나'가 됩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Im Anfang ist die Beziehung)."
갓난아기를 떠올려보면, 아기는 세계를 사물로 인식하기 전에, 먼저 손을 뻗어 관계를 원합니다. 엄마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목소리를 향해 온몸으로 뻗어갑니다. 아기에게는 '무엇을 안다'는 것보다 '누군가와 이어진다'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부버는 이 관계를 향한 갈망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갑니다.
만남은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은 어디에서 일어날까요. 내 마음속일까요, 상대의 마음속일까요. 부버의 답은 '둘 다 아니다'입니다. 만남은 나와 너 '사이(das Zwischen)'에서 일어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두 존재가 마주할 때에만 생겨나는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버에게 사랑은 내 안에 고여있는 감정이 아니라, '나'가 '너'에 대해 지는 책임이며, 나와 너 사이에 살아 있는 무언가입니다. 사랑은 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서 계속해서 흐르는 생동감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너'는 다시 '그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민감한 부분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나-너'의 만남 속에 계속 머무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깊은 만남이라도, 내가 그 순간을 되새기고 분석하고 이름 붙이는 순간, '너'는 다시 '그것'으로 뒤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방금 온전한 존재로 마주했던 그 사람도, 곧 '오늘 기분이 어때 보이는 사람'이라는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돌아갑니다. 부버는 이것을 인간 운명의 '고귀한 슬픔'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이 만남은 억지로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자, 지금부터 너를 온전한 존재로 만나겠어'라고 계획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만남은 내가 온몸으로 나아가는 의지인 동시에, 나에게 찾아오는 '은총(grace)'이기도 합니다. 반은 내가 여는 것이고, 반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은 대부분 '나-그것'의 세계에서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나-너'의 순간들이, 그 모든 평범한 시간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하나의 덧붙임: 영원한 너
부버는 종교적인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나누는 모든 진정한 만남의 선들이, 결국 하나의 궁극적인 '너'를 향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을 그는 '영원한 너(das ewige Du)'라 이름 붙였습니다. 어떤 종교를 가졌든 아니든, 이 대목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는 그 작은 순간 속에, 우리 존재를 초월하는 무언가 거대한 것이 스며 있다는 감각 말입니다.
나와 너로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 놀이
함께 논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너'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됩니다. 아이와 논다면서도 사실은 지켜보고, 관리하고, 가르치고, '잘 크고 있나' 평가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이를 '그것'으로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평가를 멈추고, 아이와 온몸으로 마주하며 함께 웃을 때 — 그 순간 우리는 아이에게 '너'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나-너'의 세계에 삽니다. 아이는 가족을, 나무를, 친구를 더 자주 온전한 존재로 만납니다. 반대로 어른은 쓸모와 효율의 '나-그것'에 갇히기 쉽습니다. 놀이는, 그런 어른이 다시 '너'의 세계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현대사회처럼 화면이 모든 사람을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이미지로, 하나의 '그것'으로 바꿔놓는 시대에는, 눈앞의 누군가를 온몸으로 진짜 만나는 일이 가장 급진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아이와 몸으로 뒤엉켜 노는 그 평범한 시간이, 사실은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방식을 지키는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글은 Martin Buber의 『나와 너(Ich und Du, 1923)』의 핵심 아이디어를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원저를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놀이터에서 아이를 그네에 태우고 밀어줍니다. 손은 기계적으로 그네를 밀지만, 머릿속으로는 내일 회사에서 할 일을 생각하고, 한 손으로는 휴대폰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아이는 분명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 아이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뒤를 돌아봅니다. 고개를 든 나와 아이의 눈이 마주칩니다. 아주 짧은 순간, 회사 업무도 휴대폰도 사라지고, 세상에는 오직 웃고 있는 이 아이와 나만 남습니다.
같은 상황 속의, 같은 두 사람인데 무언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바로 이 차이가 인간이 존재하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1923년에 쓰인 그의 얇지만 깊이 있는 책, 『나와 너(Ich und Du)』 를 소개합니다.
세계를 대하는 두 개의 '근원어(Grundworte)'
부버는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두 개로 나눕니다. 그리고 이를 '근원어(Grundworte)'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가 단순한 단어를 넘어, 입 밖에 내는 순간 하나의 존재 방식을 세우는 말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두 근원어는 바로 '나-그것(Ich-Es / I-It)'과 '나-너(Ich-Du / I-Thou)'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세트에서의 '나'조차 같은 '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을 대하는 나와 '너'를 대하는 나는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관계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됩니다.
'그것(Es)'의 세계
'나-그것'의 관계에서, 나는 상대를 하나의 대상으로 다룹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사용합니다. 그 대상은 여러 사물 중 하나이고, 나에게 쓸모나 정보로 존재합니다. 부버는 이것을 '경험(Erfahrung)'의 세계라 불렀습니다.
이 세계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물건을 사고, 길을 찾고, 일을 처리하는 모든 순간이 '나-그것'의 세계 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사람마저 '그것'으로 대한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할 프로젝트'로, 동료를 '쓸모 있는 자원'으로, 눈앞의 사람을 '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볼 때, 우리는 나-그것의 세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라면, 우리 내면의 뭔가 중요한 것이 서서히 죽어가고 맙니다.
'너(Du)'의 세계
'나-너'의 관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관계에서 '나'는 상대를 온전한 존재로 만납니다(Begegnung). 상대는 더 이상 여러 흔한 사물 중 하나가 아니라, 내 앞에 온전히 마주 선 하나의 현존이 됩니다. '나'는 '그'를 경험하거나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주하고 함께 관계(Beziehung) 안에 섭니다.
부버 철학의 가장 핵심 문장이 이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삶은 만남이다(Alles wirkliche Leben ist Begegnung)." 그네 위에서 아이와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잡생각이 사라지고 오직 아이와 나만 남았던 그 순간이 바로 '나-너'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은 분석이 아닌 현존이고,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Gegenwart)'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를 통해 '나'가 됩니다
부버는 또 이렇게 말 합니다. 우리는 먼저 완성된 '나'로 존재한 후에 남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남을 통해 비로소 '나'가 됩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Im Anfang ist die Beziehung)."
갓난아기를 떠올려보면, 아기는 세계를 사물로 인식하기 전에, 먼저 손을 뻗어 관계를 원합니다. 엄마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목소리를 향해 온몸으로 뻗어갑니다. 아기에게는 '무엇을 안다'는 것보다 '누군가와 이어진다'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부버는 이 관계를 향한 갈망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갑니다.
만남은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은 어디에서 일어날까요. 내 마음속일까요, 상대의 마음속일까요. 부버의 답은 '둘 다 아니다'입니다. 만남은 나와 너 '사이(das Zwischen)'에서 일어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두 존재가 마주할 때에만 생겨나는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버에게 사랑은 내 안에 고여있는 감정이 아니라, '나'가 '너'에 대해 지는 책임이며, 나와 너 사이에 살아 있는 무언가입니다. 사랑은 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서 계속해서 흐르는 생동감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너'는 다시 '그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민감한 부분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나-너'의 만남 속에 계속 머무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깊은 만남이라도, 내가 그 순간을 되새기고 분석하고 이름 붙이는 순간, '너'는 다시 '그것'으로 뒤바뀌어 버리고 맙니다. 방금 온전한 존재로 마주했던 그 사람도, 곧 '오늘 기분이 어때 보이는 사람'이라는 관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돌아갑니다. 부버는 이것을 인간 운명의 '고귀한 슬픔'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이 만남은 억지로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자, 지금부터 너를 온전한 존재로 만나겠어'라고 계획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만남은 내가 온몸으로 나아가는 의지인 동시에, 나에게 찾아오는 '은총(grace)'이기도 합니다. 반은 내가 여는 것이고, 반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은 대부분 '나-그것'의 세계에서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나-너'의 순간들이, 그 모든 평범한 시간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하나의 덧붙임: 영원한 너
부버는 종교적인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나누는 모든 진정한 만남의 선들이, 결국 하나의 궁극적인 '너'를 향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을 그는 '영원한 너(das ewige Du)'라 이름 붙였습니다. 어떤 종교를 가졌든 아니든, 이 대목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는 그 작은 순간 속에, 우리 존재를 초월하는 무언가 거대한 것이 스며 있다는 감각 말입니다.
나와 너로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 놀이
함께 논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너'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됩니다. 아이와 논다면서도 사실은 지켜보고, 관리하고, 가르치고, '잘 크고 있나' 평가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이를 '그것'으로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평가를 멈추고, 아이와 온몸으로 마주하며 함께 웃을 때 — 그 순간 우리는 아이에게 '너'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나-너'의 세계에 삽니다. 아이는 가족을, 나무를, 친구를 더 자주 온전한 존재로 만납니다. 반대로 어른은 쓸모와 효율의 '나-그것'에 갇히기 쉽습니다. 놀이는, 그런 어른이 다시 '너'의 세계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현대사회처럼 화면이 모든 사람을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이미지로, 하나의 '그것'으로 바꿔놓는 시대에는, 눈앞의 누군가를 온몸으로 진짜 만나는 일이 가장 급진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아이와 몸으로 뒤엉켜 노는 그 평범한 시간이, 사실은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방식을 지키는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글은 Martin Buber의 『나와 너(Ich und Du, 1923)』의 핵심 아이디어를 일반 독자를 위해 쉽게 풀어 쓴 것입니다.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원저를 찾아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