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현대 신경과학에서 가장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 중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각이 몸에 뿌리내리고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체 감각을 느끼고 해석하지 못하면 자기자신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즉 우리는 그 감각을 인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서 안전한 방향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감각이 둔화되면(혹은 보상해 줄 감각을 찾아 헤매는 상태가 되면) 삶을 조금 더 쉽게 견딜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자신의 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온전하게, 감각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느낌까지 잃는다. 


(감정 인지 불능증은) 자신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다. 이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몸이 어딘가 불편하다고 느끼지만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환자 자신은 애매하면서도 괴로운 여러 가지 신체 문제를 겪지만 의사는 아무런 진단도 내릴 수 없다. 몸의 일상적인 요구를 조용히 의식해 개입하고 반응하지 못하는 감각 상실 상태가 되면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중략) 몸이 원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몸을 돌볼 수도 없다.


안전한 유대관계는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만드는 필수 요소다. 단지 다른 사람이 존재하기만 하는 상황은 사회적 지지와 다르다. 중요한 것은 ‘상호 의존’으로, 주변 사람들이 나와 나의 말을 제대로 보고 듣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마음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생리학적인 측면에서 마음이 안정되고 치유받고 성장하려면, 지금 자신이 안전하다는 기분을 강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정이나 사랑을 제공해줄 처방전은 어떤 의사도 써줄 수 없다. 우정과 사랑 모두 복잡하고 아주 힘든 과정을 거쳐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담긴 눈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이나 자신을 보면 미소가 번지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면, 필요할 때 도와주러 달려와 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 자기 자신을 돌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약물이나 알코올, 폭식, 몸에 상처를 내는 것 등 조금의 위안이라도 될 만한 일은 무엇이든 시도 해본다.


감정이 주로 머릿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통제력을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지만, 가슴이 무너지거나 복부를 한 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은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이 끔찍한 내장 감각을 떨치려고 무엇이든 시도한다. 다른 사람에게 절박하게 매달리거나 약물 또는 알코올의 기운을 빌려 감각을 무디게 만들거나, 칼로 자기 피부를 그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감각’으로 대체하는 행동 등이 이에 포함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성인들은 자신의 느낌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신체의 감각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굉장히 화가 난 모습이면서 자신은 화가 안 났다고 부인하고,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는데 괜찮다고 말한다. 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식하지 못하니 자신의 욕구도 인식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스스로를 잘 돌보지 못한다. 그래서 적정량의 음식을 적절한 시점에 먹거나 필요한 만큼 잠을 자는 일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트라우마 희생자들은 자기 몸의 감각에 익숙해지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회복될 수 없다. 깜짝 놀란 상태로 산다는 건 늘 경계 태세에 있는 몸으로 살아가는 걸 의미한다. 화가 난 사람들은 화난 몸으로 살아간다. 아동 학대 피해자들의 몸은 편안함과 안전감을 느끼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이상 늘 긴장하고 방어한다. 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각과 신체가 주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신체적인 자기 인식은 폭군처럼 제멋대로 구는 과거를 흘려보내는 첫걸음이다. 


자신의 감각과 감정이 존재하는 내적 세계를 어떻게 하면 활짝 열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까? 나는 환자들을 치료할 때, 먼저 몸이 느끼는 감각을 인식하고 설명해 보라고 한다. 분노, 불안, 공포 같은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 아래에 놓인 신체 감각을 인식하는 것으로, 갑갑함, 열기, 근육의 긴장, 따끔거리는 느낌, 무너지는 기분, 공허함 등이 느껴질 수 있다. 이와 함께 나는 어떤 감각이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주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그리고 환자가 자신의 호흡과 몸짓, 움직임을 인식하도록 한 후, 정작 자신이 아무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과거의 부정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슴이 조인다 거나, 배가 슬금슬금 아픈 것과 같은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는지 집중해 보라고 한다.


감각 인식은 처음에 상당히 고통스러울 수 있고, 몸을 웅크리거나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 수 있다. 해소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신체로 재실현되는 것으로, 이 같은 반응을 유발하는 자세는 환자들이 그 사건이 일어났을 대 취했던 자세에 해당할 확률이 매우 높다. (중략)

그러나 환자들에게 그 고통스러운 신체 반응에 대처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대신 아빌리파이나 제이프렉사, 세로켈 같은 약을 처방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약물은 감각을 둔화시킬 뿐, 환자에게 해로운 영향을 발휘하는 원인을 해소하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주지도 못한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가라앉히려고 스스로 찾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 성적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들은 이 지점에서 딜레마에 부딪힌다. 누군가의 손길을 너무나 갈구하지만, 동시에 신체 접촉에서 두려움도 느끼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마음이 신체 감각을 느끼도록 해 줄 재교육이 필요하며, 신체가 접촉을 견디고 거기서 비롯되는 편안함을 즐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훈련을 통해 신체 감각을 심리적 사건과 연계시킬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서서히 자기 자신과 다시 연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