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김영옥, 이지은, 전희경,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진공 속에서 아픈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 속에서, ‘생애주기’의 시간표 속에서, 주변의 기대와 실망 속에서 아프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프다는 것의 의미와 위치에 대한 이야기다. 젊고 아픈 사람들은 눈앞에서 닫히는 문들을 계속 마주하며, 그 다음에 대해 질문하고 또 질문하다. 정답도 오답도 아닌 각자의 답들을 매일매일 고쳐 쓴다.


[아픈]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은 아프기 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의 ‘건강 회복’이라고 보다, 그냥 ‘사는 것’ 자체다. 삶의 목적은 삶이다. 몸을 ‘막 쓰는’ 것만큼이나 몸을 잘 관리하는 것도, 몸을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 결국 관점은 같다. 젊고 아픈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 반대다. 몸인 존재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꼭 건강하지 않아도 된다”.


늙어가는 이들이 변화하는 몸을 단순히 ‘기능들의 저하라는 노화의 관점’에서만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변화하는 몸을 계기로 현재나 심지어 미래가 과거로 되접히는 이야기의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여러 겹으로 덧써지며 동시에 지워진, 기억과 망각의 크고 작은 물결로 생의 시간을 이해하는 문리文理가 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몸의 기능들이 떨어지고 체력이 약해진다고 해서 나이 드는 사람의 몸을 그저 쇠락하는, 무엇이든 줄임으로써 가까스로 보존할 수 있는 존재로만 여기는 건 암묵적인 노년차별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아프고 늙고 의존하는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미리 앞당긴, 투사된 두려움에먹잇감이 되는 대신 두려움의 실체를 꼼꼼히 살피고 조건과 관행, 구조를 바꾸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정말 ‘의존적‘이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는가? 사실은 의존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인 것이 아닐까? 왜 특정 의존은 ‘정상‘ (심지어 ‘성취‘)으로 여겨지고 다른 의존은 모욕당하는가? 생계부양자인 남편은 아내의 돌봄노동에 ‘의존‘ 하지만, 통계상으로는 아내가 일방적으로 ‘의존‘ 한다고 여겨진다.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하지만 한국에서는 ‘기업이 노동자들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한다. 전 지구적 노동 분업에 인류 전체가 의존하고 있지만, 자기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지 않는다고 해서 ‘의존적‘ 이라고 비난받는 사람은 없다. 지배집단의 의존은 ‘의존‘으로 보이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의존의 구조 속에 연결되어 있지만 ‘의존적‘ 이라는 낙인은 그 구조의 하층부를떠받치고 있는 이들에게만 전가된다. 간단히 말해서, 독립과 의존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배체제를지속시키는 허구적 프레임인 것이다.


우리는 취약함을 극복할 수 있어서 시민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취약함을 공유하기에 시민이다. 취약함이 기본이 되는 다른 사회‘를 구상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일원인우리 모두의 경험과 관계가, 그리고 돌봄에 대한 사회 전반의 상식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돌봄을 받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그리고 권리는 의무와 ‘무관하다‘. 즉, 권리는 ‘쓸모‘를 입증하고 구매해야 하는 상품이 아니고, 각자가 기여한 만큼 돌려받는 등가교환도 아니다. 권리는 인권과 존엄성의 관점에서 고민해야 하고, 의무는 어떻게 공유되고 분배될 때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방식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선 아픈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몸인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언제나 위험과 긴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환자와 보호자가 ‘둘만 아는‘ 현실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 모두의 유한성과 온갖 ‘어쩔 수 없음‘으로 둘러싸인 사회적 상황을 매개하는 ‘적당함‘의 감각,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 사이의 갱신되는 상호적 관계성이 없다면,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완전히 지칠 때까지, 한계에 몰리게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치매에 걸릴 준비를 하는 것, 혹은 내 주위의 누군가가 치매 환자가 된 후에도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준비한다는 것은 치매가 예방되고 대비되어야 하는 불운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고 상상할 때에만 가능하다. … 치매 환자의 삶을 앗아가는 것은 치매 그 자체가 아니라, 삶, 돌봄, 관계에 대한 협소한 이해일지도 모른다. 감응 가능성을 윤리적인 관계의 근본적인 조건으로 사유하는 것은 돌봄과 의존이 삶의 근본적인 조건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