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우연과 필연으로 어떤 어른에게 애정을 갖게 되면 저는 늘 그사람의 어린이었을 시절을 상상하곤 해요. 어떤 두려움과 슬픔, 혹은 작은 일상의 기쁨과 사랑을 가진 어린이었을까? 지금 내 눈 앞에 그 아이가 있다면 어떤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첫 인사를 나누게 될까? 하고요.
대학원을 다닐 때, 동료 선생님의 논문을 도와주기 위해 몇 번에 걸쳐 20명 정도의 어린이들의 놀이를 관찰한 적이 있었어요. Playpod이라고, 노끈이나, 원통, 천조각 등 상상력을 덧대면 얼마든지 놀이를 확장할 수 있는 재료(Loose Part)들이 가득 들은 일종의 바구나가 있을 때 놀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는 연구였어요.
(아마도) 이렇게 장난감이 아닌 재료들을 놀이터에서 마음껏 펼치고 놀 수 있는 기회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미끄럼틀과 기어오르는 구조물이 있는 거대한 놀이기구에 노끈을 칭칭 감고, 천을 뒤집어 쓴 후에 또 다른 놀이터를 만들어 놀이를 하더라고요. 치우기는 쉽지 않았지만 확장되는 놀이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함께 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경험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제가 가장 묘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따로 있었어요. 솔직히 어느정도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나봐요. 다들 비슷하게 술래잡기를 하고, 그네를 타고, 소꿉놀이를 하는 정도이지 않을까 하고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제가 관찰을 진행한 30분 동안 어떤 아이 무리는 놀이터 구석에 모여 한참 동안 이야기 꽃만 피우기도 하고요, 정말 30분 내내 끼야아 소리를 지르며 잡기 놀이만 한 아이들도 있었고, 그 시간 내내 모래와 돌이 있는 구석에서 돌을 정렬하고 쌓으면서 집중하는 모습을 관찰한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러다 문득, ‘설마 지금 아이들이 노는 모습대로, 그 모습을 반영한 성인이되는 건 아닐까?’ 하는 조금은 오만하고도 소름 돋는 의구심이 생겼어요. 저도 제가 어릴 때 어떤 놀이에 빠져서 나올 수가 없었던 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 연관을 밝혀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아이가 노는 모습 대로 성인이 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놀이의 중요성에 더 공감해줄 수 있는 기회가 될까요?
어렸을 때 저희 집은 작은 슈퍼마켓을 했어요. 슈퍼 바로 맞은편에 놀이터 하나가 있었는데, 정말 문 하나면 열고 나가면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제일 좋아했던 건 그네와 미끄럼틀. 친구 둘이서 같은 그네를 타곤 했는데 혹시 윤일도 그렇게 타봤어요? 한 사람은 앉아 있고, 한 사람은 의자 양 옆에 있는 틈에 발을 넣고 서서 타는 거예요. 서 있는 친구의 반동으로 그네가 나아가는 거죠. 무릎을 접었다 폈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그네는 삐걱거리고 아랫배는 간질간질 해요. 저는 친구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웃었어요.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친구는 빨리 내려오라고 재촉하고요.
정말 집 앞에 놀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매일 놀이터에 갔어요. 엄마 몰래 불량식품도 좀 챙겨서 친구들한테 나눠줬죠. 친구들은 환호했고 저는 영웅쯤 된 것 같았어요. 하루는 미끄럼틀을 타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거기에 새우깡 몇 개가 떨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얼른 주워 먹었죠!! 아무도 못 본 줄 알았는데 멀리서 엄마가 네가 비둘기냐!!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때 저랑 친구들은 놀이터에 있는 모든 게 괜찮았어요. 옷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도 괜찮고, 바지 무릎이 닳도록 바닥을 기어가는 것도 좋았어요. 그저 지금 당장 이 놀이를 완성시킬 돌을 찾으러, 물을 떠오러, 버려진 페트병을 주우러 가는 것이 더 중요했죠. 정돈되어 있어야하는 것과는 아주 반대 방향으로 자유롭게 더러워졌어요. 그리고 다음날이면 또 그렇게 모여서 노는거죠. 애쓰지 않아도요.
제가 7살이 되자 우리 집은 슈퍼를 정리하고 놀이터랑 조금 떨어진 집으로 이사를 했어요. 엄마는 돈을 벌러 나갔고, 전 혼자 집에 있는 날이 많았어요. 그때는 놀이터를 가도 친구들에게 나눠줄 불량식품도 없고,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고 말하던 엄마도 없었어요. 어쩜 그렇게 순식간에 놀이터 풍경이 달라졌을까요? 내가 매일같이 갔던 놀이터는, 더 이상 안전하지도 재밌지도 않았어요. 놀이터를 꾸리던 여러 가지 요소(언제든 뛰어가 쉴 수 있던 집, 땀에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겨주던 엄마의 손, 모래를 맛보자고 하던 엉뚱한 친구들, 무엇보다 불.량.식.품)들 없이는 불가능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놀이터는 장소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7살의 저는 엄마를 기다릴 때면 놀이터 그네에 앉아, 열을 셌어요. 1, 2, 3, 4…열 번만 세면 엄마가 나타난다 얍! 이런거죠. 그러다 딱 한번 그 열에 맞춰 엄마가 나타난 적이 있어요. 마법처럼요. 저는 믿을 수 없어 엄마아아아 하고 달려갔어요. 그 시간을 모두 품어준 곳, 그곳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놀이터였어요.
춘천에서 미래들의 첫 만남을 가진 날 포터가 최고의 놀이터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하며 상기된 표정이 떠올라 이렇게 편지를 써요. 최고의 놀이터는 어떤 놀이터일까요? 그리고 포터에게, 또 어쩌면 이 편지를 함께 읽고 있을 미래들이 삶에서 가장 사랑했던 놀이터는 어떤 곳인가요?
질적 수준이 높은 놀이터에 대한 이론이 없지는 않습니다. 2018년에 300곳 이상의 놀이터를 관찰해 만든 실외 놀이터 질적 수준 평가척도의 하위범주로는 위치 및 접근성, 놀이 영역의 구성, 놀이기구 및 놀이 자료의 다양성, 다양한 놀이 경험 제공, 위험 감수 및 도전적인 놀이, 안전 및 편의시설의 관리 지면 구성이 있다고 해요. 대체적으로 도시공원, 주택단지, 초등학교, 영유아기관에 있는 실외놀이터 점수가 순서대로 평균 점수가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최지예, 2018). 하위범주의 이름만으로는 어떤 특성이 있어야 하는지 잘 상상이 안갈 수도 있어서 하나씩 설명해보자면,
‘위치 및 접근성’은 놀이터가 아동이 접근하기 쉽고 안전한 곳에 위치하며, 아동 및 성인에 의해 자주 이용될 수 있는 곳에 있는지에 대해 평가합니다.
‘놀이 영역의 구성’ 범주에서는 놀이터 내의 놀이영역들이 서로 다르게 다양하며 균형 있게 구성되었는지, 영역 간 구분과 연결은 적절한지에 대해 평가합니다.
‘놀이기구 및 놀이 자료의 다양성’은 놀이터 내에 놀이를 촉진하는 놀이기구, 자연물, 지형의 변화 및 표면 재료의 구성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놀이 환경을 평가 하는 범주입니다.
‘다양한 놀이 경험의 제공’은 놀이터 내 놀이 환경이 아동에게 다양한 놀이 경험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동의 놀이가 다양하게 촉진되는지에 대해 아동의 놀이 행동 관찰을 토대로 평가하는 범주입니다.
‘위험 감수 및 도전적 놀이’는 아동들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봄으로써 위험을 미리 학습할 수 있도록 하며 스릴을 느낄 수 있는 도전적인 놀이 요소들이 놀이터 내에 적절히 마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평가 범주입니다.
‘안전 및 편의시설의 관리’는 놀이터의 전반적 부지 상태 및 안전 관리, 편의시설의 구성 및 유지 상태가 적절한지를 평가하는 범주입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척도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최근 미래들과 시간을 보내면서는 이상하게 이 척도가 납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어느 공간에 있든 안전하게 느끼는, 놀이성이 높은 사람과 적절한 도구와 가이드가 있었을 때 그 어느곳보다 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놀이터가 됐던 경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잘 만든 놀이터라고 해도 그 곳을 즐겨 찾게 만드는 문화를 만들지 못하면 결국 그 놀이터는 ‘놀이가 소거된 놀이터’가 되고 말겠지요. 그 예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이들만 놀이터에서 놀게 하는 경비원의 이야기나, 13세 이상의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나이 제한을 걸어놓은 많은 놀이터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저는 놀이터에서 그네와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갈 수 있는 구조물, 물과 풀을 이용해 무언가를 마음껏 만들 수 있는 모래밭, 아니면 몸을 숨길 수 있는 구조물들을 가장 좋아했었습니다. 어린이에게 일상에서 쉬이 주어지지 않는 세 가지의 가치를 찾아 놀이터에 갔던 것 같아요. ‘스릴과 ‘쓸데없는 무언가를 마음껏 만들 수 있는 자원’, 그리고 ‘사라질 자유’요.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꼭 대단한 구조물이 있지 않아도 저 세 가지가 있다면 저에게는 놀이터로 느껴졌을 것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단지 어린이에게는 그럴 수 있는 장소가 거의 놀이터밖에 없었을 뿐.
그런 측면에서 제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아무 때나 먹을 자유를 얻은 지금, 어쩌면 저는 일상 어느 곳이나 놀이터로 만들 자유를 얻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종류의 스릴과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쓸데 없는 무언가를 마음껏 만들 수 있는 지원이 있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곳이 나의 일터나 집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편지의 마무리는 앞으로도 이야기를 주고 받을테니 오늘 포터의 하루를 응원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해보려 합니다. 날이 추운데 몸마음 따뜻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요. 곧 또 인사나눠요!
소영에게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우연과 필연으로 어떤 어른에게 애정을 갖게 되면 저는 늘 그사람의 어린이었을 시절을 상상하곤 해요. 어떤 두려움과 슬픔, 혹은 작은 일상의 기쁨과 사랑을 가진 어린이었을까? 지금 내 눈 앞에 그 아이가 있다면 어떤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첫 인사를 나누게 될까? 하고요.
대학원을 다닐 때, 동료 선생님의 논문을 도와주기 위해 몇 번에 걸쳐 20명 정도의 어린이들의 놀이를 관찰한 적이 있었어요. Playpod이라고, 노끈이나, 원통, 천조각 등 상상력을 덧대면 얼마든지 놀이를 확장할 수 있는 재료(Loose Part)들이 가득 들은 일종의 바구나가 있을 때 놀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는 연구였어요.
(아마도) 이렇게 장난감이 아닌 재료들을 놀이터에서 마음껏 펼치고 놀 수 있는 기회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미끄럼틀과 기어오르는 구조물이 있는 거대한 놀이기구에 노끈을 칭칭 감고, 천을 뒤집어 쓴 후에 또 다른 놀이터를 만들어 놀이를 하더라고요. 치우기는 쉽지 않았지만 확장되는 놀이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함께 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경험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제가 가장 묘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따로 있었어요. 솔직히 어느정도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나봐요. 다들 비슷하게 술래잡기를 하고, 그네를 타고, 소꿉놀이를 하는 정도이지 않을까 하고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제가 관찰을 진행한 30분 동안 어떤 아이 무리는 놀이터 구석에 모여 한참 동안 이야기 꽃만 피우기도 하고요, 정말 30분 내내 끼야아 소리를 지르며 잡기 놀이만 한 아이들도 있었고, 그 시간 내내 모래와 돌이 있는 구석에서 돌을 정렬하고 쌓으면서 집중하는 모습을 관찰한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러다 문득, ‘설마 지금 아이들이 노는 모습대로, 그 모습을 반영한 성인이되는 건 아닐까?’ 하는 조금은 오만하고도 소름 돋는 의구심이 생겼어요. 저도 제가 어릴 때 어떤 놀이에 빠져서 나올 수가 없었던 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 연관을 밝혀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아이가 노는 모습 대로 성인이 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놀이의 중요성에 더 공감해줄 수 있는 기회가 될까요?
윤일
윤일에게
삶에서 가장 사랑했던 놀이터는 어떤 곳인가요?
윤일이 던져준 질문 앞을 서성이며 편지를 씁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은 작은 슈퍼마켓을 했어요. 슈퍼 바로 맞은편에 놀이터 하나가 있었는데, 정말 문 하나면 열고 나가면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제일 좋아했던 건 그네와 미끄럼틀. 친구 둘이서 같은 그네를 타곤 했는데 혹시 윤일도 그렇게 타봤어요? 한 사람은 앉아 있고, 한 사람은 의자 양 옆에 있는 틈에 발을 넣고 서서 타는 거예요. 서 있는 친구의 반동으로 그네가 나아가는 거죠. 무릎을 접었다 폈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그네는 삐걱거리고 아랫배는 간질간질 해요. 저는 친구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웃었어요.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친구는 빨리 내려오라고 재촉하고요.
정말 집 앞에 놀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매일 놀이터에 갔어요. 엄마 몰래 불량식품도 좀 챙겨서 친구들한테 나눠줬죠. 친구들은 환호했고 저는 영웅쯤 된 것 같았어요. 하루는 미끄럼틀을 타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거기에 새우깡 몇 개가 떨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얼른 주워 먹었죠!! 아무도 못 본 줄 알았는데 멀리서 엄마가 네가 비둘기냐!!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때 저랑 친구들은 놀이터에 있는 모든 게 괜찮았어요. 옷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도 괜찮고, 바지 무릎이 닳도록 바닥을 기어가는 것도 좋았어요. 그저 지금 당장 이 놀이를 완성시킬 돌을 찾으러, 물을 떠오러, 버려진 페트병을 주우러 가는 것이 더 중요했죠. 정돈되어 있어야하는 것과는 아주 반대 방향으로 자유롭게 더러워졌어요. 그리고 다음날이면 또 그렇게 모여서 노는거죠. 애쓰지 않아도요.
제가 7살이 되자 우리 집은 슈퍼를 정리하고 놀이터랑 조금 떨어진 집으로 이사를 했어요. 엄마는 돈을 벌러 나갔고, 전 혼자 집에 있는 날이 많았어요. 그때는 놀이터를 가도 친구들에게 나눠줄 불량식품도 없고,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고 말하던 엄마도 없었어요. 어쩜 그렇게 순식간에 놀이터 풍경이 달라졌을까요? 내가 매일같이 갔던 놀이터는, 더 이상 안전하지도 재밌지도 않았어요. 놀이터를 꾸리던 여러 가지 요소(언제든 뛰어가 쉴 수 있던 집, 땀에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겨주던 엄마의 손, 모래를 맛보자고 하던 엉뚱한 친구들, 무엇보다 불.량.식.품)들 없이는 불가능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 놀이터는 장소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7살의 저는 엄마를 기다릴 때면 놀이터 그네에 앉아, 열을 셌어요. 1, 2, 3, 4…열 번만 세면 엄마가 나타난다 얍! 이런거죠. 그러다 딱 한번 그 열에 맞춰 엄마가 나타난 적이 있어요. 마법처럼요. 저는 믿을 수 없어 엄마아아아 하고 달려갔어요. 그 시간을 모두 품어준 곳, 그곳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놀이터였어요.
소영
포터에게
춘천에서 미래들의 첫 만남을 가진 날 포터가 최고의 놀이터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하며 상기된 표정이 떠올라 이렇게 편지를 써요. 최고의 놀이터는 어떤 놀이터일까요? 그리고 포터에게, 또 어쩌면 이 편지를 함께 읽고 있을 미래들이 삶에서 가장 사랑했던 놀이터는 어떤 곳인가요?
질적 수준이 높은 놀이터에 대한 이론이 없지는 않습니다. 2018년에 300곳 이상의 놀이터를 관찰해 만든 실외 놀이터 질적 수준 평가척도의 하위범주로는 위치 및 접근성, 놀이 영역의 구성, 놀이기구 및 놀이 자료의 다양성, 다양한 놀이 경험 제공, 위험 감수 및 도전적인 놀이, 안전 및 편의시설의 관리 지면 구성이 있다고 해요. 대체적으로 도시공원, 주택단지, 초등학교, 영유아기관에 있는 실외놀이터 점수가 순서대로 평균 점수가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최지예, 2018). 하위범주의 이름만으로는 어떤 특성이 있어야 하는지 잘 상상이 안갈 수도 있어서 하나씩 설명해보자면,
‘위치 및 접근성’은 놀이터가 아동이 접근하기 쉽고 안전한 곳에 위치하며, 아동 및 성인에 의해 자주 이용될 수 있는 곳에 있는지에 대해 평가합니다.
‘놀이 영역의 구성’ 범주에서는 놀이터 내의 놀이영역들이 서로 다르게 다양하며 균형 있게 구성되었는지, 영역 간 구분과 연결은 적절한지에 대해 평가합니다.
‘놀이기구 및 놀이 자료의 다양성’은 놀이터 내에 놀이를 촉진하는 놀이기구, 자연물, 지형의 변화 및 표면 재료의 구성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놀이 환경을 평가 하는 범주입니다.
‘다양한 놀이 경험의 제공’은 놀이터 내 놀이 환경이 아동에게 다양한 놀이 경험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동의 놀이가 다양하게 촉진되는지에 대해 아동의 놀이 행동 관찰을 토대로 평가하는 범주입니다.
‘위험 감수 및 도전적 놀이’는 아동들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봄으로써 위험을 미리 학습할 수 있도록 하며 스릴을 느낄 수 있는 도전적인 놀이 요소들이 놀이터 내에 적절히 마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평가 범주입니다.
‘안전 및 편의시설의 관리’는 놀이터의 전반적 부지 상태 및 안전 관리, 편의시설의 구성 및 유지 상태가 적절한지를 평가하는 범주입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척도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최근 미래들과 시간을 보내면서는 이상하게 이 척도가 납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어느 공간에 있든 안전하게 느끼는, 놀이성이 높은 사람과 적절한 도구와 가이드가 있었을 때 그 어느곳보다 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놀이터가 됐던 경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잘 만든 놀이터라고 해도 그 곳을 즐겨 찾게 만드는 문화를 만들지 못하면 결국 그 놀이터는 ‘놀이가 소거된 놀이터’가 되고 말겠지요. 그 예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이들만 놀이터에서 놀게 하는 경비원의 이야기나, 13세 이상의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나이 제한을 걸어놓은 많은 놀이터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저는 놀이터에서 그네와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갈 수 있는 구조물, 물과 풀을 이용해 무언가를 마음껏 만들 수 있는 모래밭, 아니면 몸을 숨길 수 있는 구조물들을 가장 좋아했었습니다. 어린이에게 일상에서 쉬이 주어지지 않는 세 가지의 가치를 찾아 놀이터에 갔던 것 같아요. ‘스릴과 ‘쓸데없는 무언가를 마음껏 만들 수 있는 자원’, 그리고 ‘사라질 자유’요.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꼭 대단한 구조물이 있지 않아도 저 세 가지가 있다면 저에게는 놀이터로 느껴졌을 것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단지 어린이에게는 그럴 수 있는 장소가 거의 놀이터밖에 없었을 뿐.
그런 측면에서 제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아무 때나 먹을 자유를 얻은 지금, 어쩌면 저는 일상 어느 곳이나 놀이터로 만들 자유를 얻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종류의 스릴과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쓸데 없는 무언가를 마음껏 만들 수 있는 지원이 있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곳이 나의 일터나 집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편지의 마무리는 앞으로도 이야기를 주고 받을테니 오늘 포터의 하루를 응원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해보려 합니다. 날이 추운데 몸마음 따뜻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요. 곧 또 인사나눠요!
윤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