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교육 70호] 몸을 살리는 교육① <느끼는 몸의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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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층위 ‘보이는 몸’에 이어) 두번째 층위는 ‘기능하는 몸'. 어떤 과업이나 역할을 수행하는 몸이다. 성과가 최고 가치인 사회에서 기능하는 몸 역시 보이는 몸과 함께 이 시대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강력한 층위다. 성과주의, 능력주의를 내세우는 사회에서 몸은 일을 수행하는 도구이자 노동 상품이 된다. 그 상품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기에 해내야 할 것들은 늘 넘치고, 실패나 뒤쳐짐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추락이다. 그럴 수록 사회는 더욱 보수화되고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분열할 수밖에 없다. 불안과 조바심이 일상인데, 삶과 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안목이나, 새롭게 변화시킬 상상력이 들어올 자리가 있겠는가. 할 것은 많은데 따라주지 못하는 ‘나약한' 몸들은 ‘내가 체력이 안 좋아서 그래’ 하며 자주 아프고 피로해 한다. 

‘체력이 안 좋아서 그래'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회자되는 말이다. 체력은 사전적으로 신체적 힘과 능력을 말하지만, 한국에서 말하는 ‘체력'은 사뭇 다르다. 대개 어떤 일을 멈추지 않고 잘 수행하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체력이 좋다’는 것은 ‘잘 버틴다'는 말이다. 실제 그 사람 몸의 상태와는 무관하며, 몸이 안 좋아도 잘 느끼지 못한 채 엄청난 투지를 발휘하는 병든 노동자들이 굉장히 많다. 반대로 ‘체력이 약하다'는 것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참고 ‘존버하기가 벅차다'는 의미다. 사실 한국에서 ‘체력이 약한' 사람들은 그들의 몸이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비상식적인 노동 강도, 착취를 용이케 하는 위계 문화와 같은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반증하고 있다.

마지막 층위로, 보이는 몸과 기능하는 몸 이전부터 형성된 더 근원적이고 동물적인 몸이 있다. 바로 ‘느끼는 몸’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뭐가 위험한지, 이로운지, 즐거운지, 고통스러운지 알려주는 몸이다. 느끼는 몸에는 양날의 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면이 있다. 감각이 둔하면 혹은 무뎌지면 삶은 조금 더 쉽게 견딜 수 있지만, 자신의 몸 내부에서 보내는 신호나 벌어지는 일을 잘 인지하지 못해 오히려 삶의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다.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하게 살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존재적 위기가 오기도 하고 - 보통은 중년에 온다고 하지만 사람에 따라 생애주기 언제든 찾아온다 - 해소되지 못한 채 몸에 꾹꾹 눌러두던 감정들이 통증이나 질병으로 발현되어 뒤늦게 관심을 요청하기도 한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인간의 고도화된 지적 능력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는데, 지능의 근간이 바로 사건이나 상상에 의해 촉발된 느낌과 감정들이라는 것이다. “느낌은 우리가 문제에 반응하도록 동기를 유발하고 또한 그 반응이 성공적인지 그렇지 못한지 감시"하기에 “고통과 손실이 적고 편안하고 즐거운 쪽으로 변화시키려는 의도”로서 문화를 발명해갈 수 있었다. 몸의 느낌으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가 처한 곤경을 해결할 기발한 방법을 개발해내며 의식주를 해결하는 방법을 발전시키고 의학을 발명”했다며, 느낌과 감정은 문명의 발달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 존재를 감지하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여겨져 왔다"고 지적한다. <데카르트의 오류>, <느낌의 진화>를 비롯한 여러 저서들에서 다마지오는 그간 간과되어왔던 ‘느낌’의 역할과 의미를 생물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여전히 냉철한, 즉 감정과 단절된, 반쪽짜리 이성을 더 우월하다는 낡은 문화가 공고하다. 더 열등한 존재를 ‘감정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수치심을 주고 우롱하고 차별하기도 한다. 여성이 더 감정적이어서 사회에서 큰 역할을 맡을 수 없다는 논리, 아이는 덜 이성적이어서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아직도 만연하다. 느낌 그 자체, 혹은 느낌의 표현을 억누르고 부정하는 건 가장 미묘하고 무서운 방식의 억압과 폭력의 방식이다. 그러나 느낌은 나에 대해 알아가고 문제를 인지,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오롯이 느끼고, 신체 느낌과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연습은 무엇보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나를 느끼는 게 바탕이 되어야 타인과 교감하며 소통을 폭넓고 깊게 하는 능력이 따른다. 말과 기술로서만 강조하는 소통력은 연기일 뿐, 관계를 발전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동력은 ‘느끼는 몸’에 있다.


아이가 학교를 가게 되면 해내야 하는 첫 적응 역시 의자에 앉아 40~50분을 버티는 일이다. 본인의 권위를 과시하는 맥락이 아니라 교사의 권위와 통제에 순응하는 차원에서 꼿꼿하게 앉아 있기를 강요받는다. 가만히 하중을 감당하기보다는 수시로 움직이며 주변을 살피는 일에 적합한 척추가 이 고정된 자세를 쉽게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교사의 관심과 인정, 최소한의 대우를 받으려면 의자에 앉아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몸의 자연스런 반응을 억누를 수밖에. 오전부터 시작해서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오랜 시간 의자에 바르게 앉아 있는 것에 적응하는 것은 곧 몸의 느낌을 단절시키는 연습이기도 하다.

- 변화의월담, <느끼는 몸의 교육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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