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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과정 중이던 장녀 장남 부부의 밑에서 제왕절개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인 나는 뱃속에서 먼저 꺼내져 첫째가 되었다. 손주를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맏아들 윤(胤)’을 쓴 ‘윤일’을 손녀에게는 ‘옥돌 민(珉)’을 쓴 ‘민일’이라는 이름을 미리 지어두셨다. 둘째로 태어난 손자에게 맏아들의 이름을 주려는 할아버지께 엄마는 딸이라고 맏이의 이름을 주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맏아들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자마자 동생이 생긴 여자아이의 삶이 시작됐다. 언어도 신체 발달도 느렸던 동생은 기억나지 않는 시절부터 나의 일부였다. 우리는 대부분 비언어적으로, 때로는 언어적으로 서로의 고통을 감지했다. 어눌한 발음 탓에 동생의 말을 어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할 때는 통역사를 자청했다. 여느 맏이처럼, 본인의 고통을 억누르고 책임감을 우선시하느라 표현하는 것이 서툰 부모님, 말과 신체의 발달 수준이 달라 고통을 때로 강하게 드러내는 동생 사이에서 몸의 비언어적인 신호를 읽는 감각은 점차 뾰족해졌다. 아픈 쌍둥이 동생과 5살 터울의 막냇동생까지 챙기면서 맞벌이를 하느라 허덕이는 부모님께 나의 힘듦까지 짊어지게 할 수 없다고 여겼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특히 가족 문제들은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랬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든 해결할 때까지 누군가와 공유하지 않았다. 서럽고 화가 나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최대한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언어 발달이 느린 동생이 화가 나거나 슬플 때, 눈앞의 나와 막내에게 그 답답함을 표출하면서 이런 상황은 더욱 공고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이 행동해선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말에 책잡히지 않으려 일단 감당하고, 안전한 곳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이 상황을 전했다. 부모님은 소아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던 동생이 더 안 좋아져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 크게 혼내지 못하겠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남중으로 진학한 동생은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느려 학교생활이 쉽지 않았다. 강릉이라는 작은 소도시에서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상황에서 동생의 친구들은 ‘네 누나는 멀쩡한데, 너는 왜 그래?’라고 했다. 동생은 이 모든 상황이 홀로 건강하게 태어난 나 때문이라고 자주 말했다. 나는 부모님과 동생의 입장을 지나치게 잘 이해해 버렸다. 망설임 끝에 이야기를 글로 적고 있는 지금도, 이 글로 인해 사랑하는 누군가가 상처받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마음 졸이고 있다.